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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66] 사법 판결은 독자적 예술이 아니다

바람아님 2017. 9. 19. 05:52

(조선일보 2017.09.19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조지 엘리엇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대사인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 독백에서 

햄릿은 죽어버릴까, 그래도 살아야 하나를 저울질한다. 

그때 죽으면 안 봐도 되는 사나운 꼴 중 하나로 꼽은 것이 '질질 끄는 소송(the law's delay)'이다. 

영국 문학에는 법에 호소해 정의를 찾으려다가 소송 비용 때문에 파산하고 억울한 판결 때문에 

파멸하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이번에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김명수 후보가 소위 '튀는 판결'에 대해 "법관이 충실 의무를 다하여 

내린 결론(판결)이라면 그것이 대법원의 기존 판례나 사회 일반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괜찮다. 

다르다면 원칙적으로 상소 제도를 통해 시정되어야 한다"면서 법관이 양심에 따라 내린 판결에 대해 

'튀는 판결'이라며 법관을 폄훼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다.


요즘 떠도는 '인터넷 유머' 중에 대부분 '마마 보이'인 초임 법관들이 판결을 앞두고 자기 어머니의 '코치'를 받는다는 

우스개가 있다. 그 어머니가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조언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 우스개의 요점은 힘없는 서민의 운명이 

얼마나 하찮게 처리되느냐는 것 아니겠는가. 

김명수 후보는 그 튀는 판결로 일생이 좌우될 원고나 피고의 입장이었더라도 그 판결에 토를 달지 않았겠는가.

'억울하면 상소하라'가 정답인가. 더구나 상고심 허가제까지 도입하겠다면서?


조지 엘리엇의 소설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에 나오는 털리버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물방앗간의 수리권(水利權)을 

침해당하게 되자 빚을 끌어다 소송을 벌였다가 패소한다. 

가재도구까지 경매에 부쳐져 채권자들에 대한 법적 변제는 끝났으나 자기 때문에 손해를 본 채권자들 생각에 한시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털리버는 물방앗간을 차지한 상대편 변호사 웨이켐 밑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한다. 

몇 년 후 아들이 그의 채무를 다 갚아주던 날 털리버는 웨이켐을 채찍으로 미친듯이 후려친다. 

그 채찍질에 웨이켐은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지만 소송으로 이미 심신이 피폐해진 털리버는 몸져눕고 결국 세상을 뜬다.


김명수 후보가 법관의 이념과 재량을 국민의 피눈물보다 중시한다면 패소자를 무작위로 10명만 만나보길 바란다.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1, 2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이봉지 [같이]옮김

 민음사/ 2007/ 448p, 445p

808-ㅅ374ㅁ-142/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다시 읽기

한애경 지음/ 동인/ 2011/ 177 p

843.09-ㅎ329ㅍ/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강서]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