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과 배신의 경험 잊지 말아야
대북특사는 줄 타는 아크로바트
'비핵화 원칙' 가슴속에 새겨야
최선 방책은 '원칙 밀고 나가기'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남한의 고령세대도 마찬가지다. 대남 통일전선부장, 인민군 대장 김영철이 태연하고 거침없이 비무장지대를 통과했다. 그 장면은 70대, 80대의 전쟁 트라우마를 날카롭게 건드렸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피폭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된 김영철, 1946년생으로 유년기에 전쟁을 목격했고 저 유별난 북한 체제에서 ‘전쟁기계’의 상징인물이 된 그다. 올해 70대 초반인 어떤 선배가 장탄식을 했다. ‘나는 여태 전쟁공포증에 시달리는데 동년배인 저 친구는 전쟁광이 됐다’고.
그런데 반전(反轉)이 일어나고 있다. 북한의 태도에 변화 조짐이 확연하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개구멍으로 들어왔다’고 했고, 누군가는 ‘사살해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예년 같으면 평양 조선중앙방송에서 난리가 났을 텐데 김영철은 입을 봉한 채 초청장을 확인해주고 돌아갔다. 7차 핵실험을 우려했던 게 불과 석 달 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군부 강경파가 전략을 바꾸기엔 너무 짧은 이 기간에 대체 저 급선회의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은 다급해졌음이 틀림없다. 북한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제의는 이런 배경에서 돌출했다. 북한이 내민 초청장에 우리 정부가 선뜻 확답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초청장에는 반드시 대가목록이 적혀 있었다. 김일성의 급서로 정상회담이 무산된 이후 북한의 초청장을 실행한 것은 오직 진보정권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그랬고, 이제 문재인 정권. 김대중 정권은 선물로 5억 달러를 줬다. 노무현 정권은 개성공단을 줬고, 200만㎾ 전력 공급을 약속했다. 이명박 정권은 쌀 50만t과 1억 달러 청구서를 받았는데 결국 결렬됐다. 박근혜는 아예 장벽을 쌓았다. 이번에는 어떤 요구사항일까. ‘언젠가 본 듯한’ 그 유혹과 배신의 쓰라린 경험을 문재인 정권은 잊지 않아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비즈니스 본능은 이 지점에서 단호했다. 25년간 지겹도록 들었던 ‘대화 용의 있음’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득(得)이 없는 대화는 무효다. 그는 오히려 강공으로 받았다.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암시했고, 타격에 준하는 군사옵션을 공언했다. ‘닥치고 공격!’, 속은 후련한데 ‘한반도 불바다’ 악몽이 전 세대로 확산됐다. 대북특사는 미국과 북한의 강공 사이에서 줄을 타는 아크로바트다. 떨어지면 끝장, 천신만고 끝에 구축한 반 평짜리 전망대는 날아간다.
사실 더 난감한 쪽은 북한일 거다. 봉쇄전략이 1년 더 지속된다면 북한은 사막의 풀처럼 말라 죽을지 모른다. 청년 김정은은 90년대 초 북한 주민 300만 명이 아사한 참극을 얘기로만 들었다. 극한적 경제공황 앞에서 철인(鐵人)은 없다. 그런 까닭에 초청장에 첨부될 대남청구서를 찢어 버리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언젠가 본 듯한 그 오류를 반복할 때가 아니다. 북한이 더 다급해지도록 트럼프의 거친 노선에 힘을 실어야 한다. ‘비핵화 원칙!’, 지금 평양과 대적할 대북특사단이 가슴속에 새길 보국구호(保國口號)다. ‘비핵화? 가소롭다!’고 평양 당국이 일축해도 앵무새처럼 되풀이 외쳐야 한다. 그래야 빈손으로 쫓겨나도 미국의 신뢰가 깨지지 않는다. 중매외교가 어설프면 양쪽의 맹공에 직면한다.
북한의 대남 전선에 분명 이상이 발생하고 있다. 연해주·중국에 묻힌 선열들이 당분간 그걸 주시하라고 이른다. 전쟁기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최선의 방책은 ‘원칙 밀고 나가기’라고 말이다.
송호근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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