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2.06. 01:42
현송월도 세계의 찬사 받기를 ..
다만 음악정치의 본질 잊지 말자
현송월 앞모습은 '꽃 파는 처녀'
뒷손엔 핵을 든 '핵 파는 처녀'임을
선군정치의 백코러스인 음악정치 유전자를 건드린 것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이다. 그는 음악 소양을 갖춘 김일성대학 청년들을 조직해 ‘택성악단’을 창단했다. 이 발랄하고 당돌한 음악밴드가 정치범수용소를 위문공연하자 김정일의 분노가 폭발했다. 장성택만 빼고 모조리 처형됐다. 전술에 능한 김정일은 악단을 거꾸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재능과 끼를 갖춘 젊은 미인들로 예술단을 만들고 북한 체제를 미화 선전하는 것. 왕재산경음악단, 보천보전자악단이 창단됐다. 당정 고위간부 연회 때 기쁨조로 활약하다가 나이가 차면 음악정치라는 명분하에 국가행사로 내몰렸다. 2009년에는 이설주, 현송월이 속한 은하수관현악단이 창단됐다.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의 영화주제가를 김정일이 작곡했다. 금성악단 소속 화영초대소 성악배우가 주제가 ‘꽃 사시오’를 정말 눈물지게 불렀다. 북한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황금예술의 극치라고 김정일을 치켜세웠다. 한층 고무된 김정일은 북한 음악계의 거장이자 ‘당의 참된 딸’을 작곡한 이찬서에게 평을 부탁했다. 이찬서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심하네요. 이 노래는 미국 동요 ‘클레멘타인’의 명백한 표절입니다.” 그러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클레멘타인을 연주했다. 연회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며칠 뒤, 이찬서와 가족은 평양에서 사라졌다(김평강, 『풍계리』).
평양손님들은 어제도 왔고, 오늘도 온다. 혹시 눈발이라도 날리면 국정원은 우산을 받쳐들 것이고, 청와대는 평양 당국이 삐칠까 노심초사 온갖 수발을 다 들 것이다. 고인이 된 가수 백설희가 불렀던 ‘봄날은 간다’의 그 여인처럼 말이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서 ‘알뜰한 그 맹세’를 의심치 않는 여인. 알긴 알 것이다. 평양 당국이 글로벌 쇼무대에 젊은 예인(藝人)들의 끼를 한껏 살려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겠다는 속셈을. ‘꽃 파는 처녀’로 감정선을 자극해 핵놀이 기억을 지우겠다는 그 음악정치의 속 깊은 뜻을.
김정일 작사·작곡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무대 장면은 이렇다.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어여쁜 빨간 꽃/ 앓는 엄마 약 구하러 정성 담아 가꾼 꽃/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이 꽃 저 꽃 빨간 꽃.’ 주연배우의 구성진 곡조가 심금을 울릴 때 배경화면에는 천리마운동과 미사일 발사 장면이 혁명의지를 고조시킨다. 이게 음악정치의 실체다.
평양은 한국 민요와 세계 명곡을 연주한다고 남한 당국을 미리 안심시켰다. 알뜰한 맹세대로, 아리랑을 부르고 베토벤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현송월이 남녘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다. 남북대화 창구가 열린다. 민족의 위상과 기상이 천정부지로 상승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진정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 게 있다. 음악정치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임을, 현송월의 앞모습은 ‘꽃 파는 처녀’이고, 뒷손엔 핵무기가 들려 있음을. 말하자면 ‘핵(核) 파는 처녀’다. ‘핵 사시오 핵 사시오 인민의 피로 빚은 어여쁜 핵’. 알긴 알 것인데 ‘오늘도 언 가슴 두드리며 실없는 그 기약’에 또 마음을 실어보는 남녘 정권에 님은 올까, 아니면 쌍코피 터질까. 봄날은 벌써 갔는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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