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울지마, 아르헨티나/페로니즘의 망령/아르헨티나의 비극

바람아님 2018. 5. 10. 17:31

[횡설수설/김광현]울지마, 아르헨티나

동아일보 2018.05.10. 03:02


아르헨티나는 소를 팔아 세계 5위 경제대국이 되었던 나라다. 1900년 전후 냉동선이 발명됐다. 비슷한 시기 발명된 철조망을 팜파스라는 대평원 위에 쳐놓고 소를 풀어 놓으면 소는 절로 먹고 자랐고 때마침 개발 붐을 탄 철도망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 수출됐다. 냉동선, 철조망, 철도 등 3대 발명품이 아르헨티나의 소를 요즘 한국의 반도체 같은 수출 블루칩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부자 나라 아르헨티나로 가정부살이를 떠난 엄마를 찾아 나선 주인공 마르코의 눈물겨운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의 시대적 배경이 그 당시다.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협상을 8일 시작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자 아르헨티나에 있던 달러화가 빠져나가 페소화 가치가 최악 수준으로 떨어지고 주가도 폭락했기 때문이다. 불과 20일 전 27.5%였던 금리가 40%로 올랐는데도 달러 이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터키 브라질 등도 비슷한 추세여서 신흥국 6월 위기설도 불거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국가부도 위기는 1982년, 2001년, 2014년에 이어 벌써 4번째다. 충격이 있을 때마다 IMF 구제금융의 단골손님이 된 것은 경제 체질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좋을 때 선진 공업국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농산물 수출국가에 머물러왔다. 농장주들에게 편중된 부(富)의 불균형은 사회적 갈등의 불씨로 작용했고 정부는 과도한 복지로 노동자와 하위층의 민심을 달랬다.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주인공 에바 페론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1997년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하다가 IMF 구제금융을 받은 전력이 있다. 지금은 외환보유액 등 그때보다 체질이 좋아진 것은 틀림없다. 이번 위기설에도 한국은 큰 피해가 없을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정부가 효과 없는 사업들에 예산을 펑펑 쏟아붓고 기업들 때리기에 나선다면 언제 또 아르헨티나의 길을 걸을지 모를 일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만파식적]페로니즘의 망령

서울경제 2018.05.09. 17:30
 194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요광장에 새 대통령의 연설을 듣겠다며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대통령이 아니라 영부인인 에바 페론에게 쏠려 있었다. 에바는 남편 후안 페론과 함께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통령궁 2층 베란다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동자들의 단결과 지지를 호소했다. 여배우 출신의 에바는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집권 이후 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여성의 지위 향상, 임금 인상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 ‘국모’라는 칭송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심성 복지정책에 따른 폐해는 아르헨티나에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로니즘’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오랫동안 노동자와 서민층을 기반으로 하는 페론주의에 젖어 있었다. 역대 정부마다 페로니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자본 통제를 실시하고 국영화에 열을 올렸다. 해마다 연금을 대폭 인상하는가 하면 전기도 공짜로 공급했다. 페론이 죽어도 페로니즘 신앙은 여전히 아르헨티나를 망령처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나라 곳간이 텅텅 비고 물가는 폭등했다.


2001년 말 아르헨티나 도심에서 수천 명의 시위대가 상점에 무단 침입해 닥치는 대로 생필품을 약탈하는 폭동 사태가 빚어졌다.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고 은행예금마저 마음대로 쓰지 못하자 참다못한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한 것이다. 결국 정부는 비상사태와 함께 대외채무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522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최근 통화가치가 급락한 아르헨티나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구제금융은) 더 강한 경제 성장과 발전을 도울 것이며 과거에 겪었던 위기를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호소했다. 2015년 집권한 마크리 정부는 페로니즘과의 결별을 선언했지만 보조금 삭감과 공공요금 인상에 반발하는 여론에 밀려 개혁노선을 점차 완화해야만 했다. 페로니즘이 남긴 무분별한 복지라는 위험한 유산이 한때 초강대국을 자랑하던 아르헨티나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아르헨티나와 IMF의 질기고 질긴 악연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천자 칼럼] 아르헨티나의 비극

한국경제 2018.05.10. 00:54

서울에서 땅 아래로 지구핵을 거치는 대척점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다. ‘맑은(buenos) 공기(aires)’라는 뜻의 이 도시에는 한때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수두룩하다.


부자들 묘역으로 유명한 ‘리골레타’도 그런 곳이다. ‘돌 건축 박물관’이라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하고 장중한 가족 묘지들이 도심 요지를 버티고 있다. “그냥 남들 가는 대로 따라만 가시오.” “에바 페론 묘소를 보고 싶다”는 이국 방문자에게 현지 안내인은 퉁명스러운 이 한마디와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빗속에도 이어지는 참배자들과 묘지 앞에 쌓인 꽃다발에서 페론주의를, 포퓰리즘 정치의 잔해를 엿봤던 연전의 방문 기억이 새롭다.


아르헨티나발(發) 금융 불안이 또 불거지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에만 15% 이상 떨어진 이 나라 페소화 가치는 사상 최저로 추락했다. 1주일 새 세 차례나 기준금리를 올려 연 40%가 됐지만, 자본유출은 쉽게 진정될 기미가 없다고 한다. 그제 결국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것은 다른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환율이 무너지면 다음은 인플레이션인데, 축구 좋아하고 탱고 즐기는 페론의 후예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과거 ‘남미 좌파 벨트’의 친구였던 베네수엘라만 봐도 잘 알 것이다. 석유매장량 1위인 자원부국 베네수엘라는 차베스·마두로 좌파 정권의 실정으로 연간 물가상승률 1만3779%의 무정부 지경을 오래 헤매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반경 700㎞가 팜파스라는 대평원인 목축부국, 농업강국 아르헨티나는 어쩌다 다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만 13차례나 했을 정도로 부실한 재정이 문제다. 몇 년 전에는 가나로 원정 갔던 자국 해군함 3척이 압류당하는 굴욕까지 당했다. 요즘 한국에서 유명세를 날리는 헤지펀드 엘리엇의 채권행사 때문이었다.


해외자본 배제, 국유화, 무상복지, 보조금 확대 등 페론 부부의 포퓰리즘 정치는 그들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5년, 기업인 출신 중도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집권했지만 70년 페로니즘의 유산을 털어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나라 곳간털기는 금방이어도 건전 재정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침체된 경제에서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올린 공공요금 때문에 물가가 급등하는 식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세대를 넘어가는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의 극단적 폐해를 뭐라고 해야 할까. ‘깊은 후유증’ ‘회복불능의 상처’ 정도로는 모자란다. 에비타에 열광했던 ‘페론 세대’는 그렇다고 치자. 페로니즘의 ‘위대한’ 유산을 받아든 지금 청·장년들은 전 세대를 어떻게 볼지…. 우리가 금을 모았던 것처럼, 그들은 팜파스 평원이라도 내다 팔까.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