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도덕 지향성 국가'다. 서울대에 8년간 유학했고 평생 한국 문명을 연구한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의 흥미로운 가설이다. 물론 이는 한국인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이 도덕 지향적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도덕으로 환원하는 도덕 근본주의를 정치 투쟁 수단으로 삼는 오래된 마음의 습관을 가리킨다. 겉으로 나타난 도덕적 우위를 권력 쟁탈 도구로 사용하는 한국적 관행을 짚은 것이다.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사상 최대 수혜자다.
문 정부는 선(善)과 정의(正義)의 구현자임을 자처하고 약자들의 편이라고 자부한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누리는 대중적 인기의 배경이다. 반면에 국정을 농단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보수 정당은 공론 영역에서 악(惡)과 불의(不義)의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보수 정당은 후안무치한 비도덕적 집단으로 대중의 기억에 각인됨으로써 정치 투쟁에서 원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이는 지난 세 번 큰 선거에서 보수가 연전연패한 까닭이며 차기 총선과 대선 전망이 암울해 보이는 핵심 이유이다.
정의의 대변자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의 모순과 이율배반적 행태도 도덕 지향 국가의 틀로 분석할 수 있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이 국회에서 거부될 정도로 부적절한 후보자였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막무가내다. '청와대 업무추진비 폭로'를 둘러싼 한국당 심재철 의원에 대한 공격도 섬뜩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운 심 의원에 대해 정부·여당은 '국가 기밀 탈취이자 국기 문란 행위이며 반(反)국가 행위'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삼엄한 정치 언어는 도덕적 우위를 장악한 자(者)의 부풀려진 자신감을 드러낸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자신들이 진리와 정의 실현의 주체임을 믿는 진리 정치의 신봉자들이다. 이들이 적폐 청산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다. 야당 의원의 의정 활동을 반국가 행위로 낙인 찍는 문 정부의 반민주적 논리는, 자기들만이 국가를 대변한다는 확증 편향의 산물이다. 문 정부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거대한 극장인 한국 사회'에서 승자로 우뚝 섰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다. 유 장관 임명 강행과 심 의원에 대한 과잉 공격은 그 징후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오만은 평양 회담 직후 절정에 이르렀다. 치솟는 대통령 지지도에 비해 바닥을 헤매는 야당을 보면서 장기 집권 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20년 집권'을 장담하더니 최근엔 '50년 집권'까지 호언할 정도다. 민주당 부설 민주연구원은 민주당이 국가를 이끄는 중심 정당이 되고 야당을 주변 정당으로 만드는 장기 집권 방략을 내놓았다. 문 정부가 중앙 권력과 지방 권력에 이어 사법부와 지상파 방송, 시민 단체까지 우호 세력으로 '접수'하는 행보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차기 총선과 대선 승리로 장기 집권 청사진을 완성한다는 그림이다.
하지만 겉모습일 뿐인 도덕적 우위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현실 정치의 책임 윤리는 오직 민생의 구체적 성과로써 판정된다. 우연과 불확실성의 공간인 정치에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삶의 현장에 보편적 정의를 세우는 건 지난하기 짝이 없는 과업이다. 진리와 정의를 독점한 진리 정치가 지상 천국을 선사하기는커녕 끔찍한 현실적 재앙으로 치닫기 쉬운 이유다.
도덕이 없는 정치도 혼란스럽지만 모든 걸 도덕으로 환원하는 진리 정치는 극심한 체제 무능과 압제(壓制)를 낳는다. 성리학의 근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독단론을 뒤섞은 한국 운동권의 진리 정치 이념은 특히 반민주적이고 반공화적이다. 몰락의 길을 걸어간 조선 왕조와 공산주의 국가들의 운명이 입증하는 그대로다.
소득 주도 성장을 진리로 여기는 문재인 정부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정책 수정을 거부한다. 정의로운 경제정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책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때, 문 정부는 스스로의 무능이나 정책 결함을 성찰하기보다 전임(前任) 정부와 현실을 탓한다. 진리의 이름으로 탈(脫)원전을 정당화하고 국가 에너지 대계를 뒤흔든다. 남는 건 국정 혼란과 경제 위기에 따른 민중의 고통이다.
진리 정치에 사로잡힌 정권의 장기 집권은 공화정을 위기에 빠트린다. 비판과 자유를 부정하는 진리 정치는 민주공화국과 동행하기 어렵다. 화려한 도덕 담론만으로 수권 정당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살리는 정당만이 대망(大望)을 이룬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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