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기는 조선 후기 장수를 뜻하는 ‘수(帥)’라는 글자가 한가운데 적혀 있는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 조선 후기 병서 ‘병학지남연의’에 따르면 수자기는 황색 바탕의 넓이 12폭, 길이 16척 무명에 12척 길이의 ‘수’자를 써넣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훈련 모습을 다룬 ‘수군조련도’ 삼도수군통제사 부분을 보면 검은색 바탕에 붉은 글씨의 수자기도 보인다. 넓은 바다에서도 눈에 잘 띄기 때문이었을 터다. 충무공 이순신 역시 이 수자기를 내걸고 진법 훈련을 했다.
수자기는 그냥 장군기가 아니다. 조선군은 모든 명령을 깃발과 신호로 전달했다. 전투에서 수자기를 잃는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미군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를 수비하던 조선군이 전원 전사하고 나서야 수자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 진란 도독이 순천 왜교성 공략에 실패하자 육군인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 장군의 수자기를 찢어버린 것은 유정이 일본과 내통해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를 더럽혔다는 질책의 뜻을 담고 있다.
수자기가 다시 우리 바다에 등장했다. 제주 남쪽 앞바다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 좌승함인 일출봉함이 수자기를 달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11개국 39척의 함정을 해상 사열했다. 우리의 바다를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이 표출됐다. 국제관함식을 반대하는 일부 주민들이 민군복합항 입구를 막고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조상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지키려 했던 수자기는 후손들이 벌이는 이 갈등의 현장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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