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제(蔭敍制)란 게 있다. 공신과 5품 이상 문무 관료들의 후손에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벼슬을 주던 제도였는데 고려 때 시작됐다. 처음엔 18세 이상 직계 1촌인 장남 한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었으나 나중엔 차남은 물론 손자, 외손자며 조카까지 조상의 '은덕'을 입을 수 있었다.
'과거'라는 공개 시험을 치르지 않은 이 제도의 폐단은 당연히 컸다. 특권 세습으로 문벌귀족을 형성한 권력층은 각종 폐단을 일으켜 고려 말 국정 문란의 한 원인이 됐다. 이 때문에 고려를 이은 조선 초에는 축소됐으나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음서로 출사(出仕)하려는 이들이 늘었단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런 음서제가 21세기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 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이 공개한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그렇다. 지난 8월 말 현재 현대자동차, 금호타이어 등 15개 기업의 단체협약에 정년퇴직자ㆍ장기근속자ㆍ사망 질병 등에 걸렸을 경우 배우자나 자녀를 우선채용하자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음덕'에 기대어 취업난을 돌파하려는 제도니 이는 음서제와 다름없다. 자기 식구를 우선 챙기려는 이들 노조의 심정은 이해가 가긴 한다. '헬조선'이니 '5포세대'니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취업이 어려운 요즈음 자기 자식에게 뭔가 '지푸라기' 하나라도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귀족노조'의 횡포다. 몇십 장씩 자기소개서를 쓰거나 몇 년씩 취업 재수를 하는 수많은 취준생들과 그들의 부모를 울리는 이기주의다. "'기름밥' 먹자는 건데 뭘 그리 까탈스럽게구냐"고? 그들이 나름 자신의 일자리에 만족했기에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 아닌가? 기름밥이라도 먹고자 하는 청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연, 학연에 이어 혈연까지 이들의 공정 경쟁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타당한가? 산업재해 피해자의 자녀를 우선 고용하거나 동점자의 경우 직원 자녀를 우대한다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 수많은 기업 중 불과 15곳에서 그런 건데"라며 사소한 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일부 귀족노조의 고용세습은 이미 여러 차례 문제가 돼온, 말하자면 '노동적폐'다.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될,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할 불공정행위란 뜻이다.
실정법상으로도 고용 세습은 엄연한 불법이다. 현행 고용정책기본법과 직업안정법은 근로자를 채용할 때 성별, 연령, 신체조건은 물론이고 신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도 고용부는 노사의 자율에 맡기고 시정 명령, 수사 같은 적극적인 조치는 하지 않고 있다. 이들 노조 또한 '노조 탄압'이라는 명분으로 고용세습과 관련한 비판에 눈감은 형편이다.
이건 채용비리 의혹으로 8일 영장이 청구됐다가 11일 기각된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사례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는 신한은행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전현직 임원 자녀 등을 특혜 채용하는 데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라지만 본질은 결국 넓은 의미의 고용세습을 거든 것이다. 문제의 15개 기업의 노조의 행위와 큰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한 뼘 한국사(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ㆍ푸른역사)'에는 1925년 예천 형평사사건을 다룬 글이 실렸다. 일반 농민들이 백정 출신들을 공격한 이 사건은 '을'에 대한 '을'의 전쟁으로 꼽힌다. 그 필자가 그랬다. "암담한 현실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의 분노는 자신들보다 강한 사람에게 향하기보다, 자신보다 약하게 보이는 집단에게 향할 가능성이 높다."
부디 대기업 노조들이 작은 기득권을 지키려 다른 약자들 가슴에 못 박는 행위를 멈추기 바란다. 고용부 또한 이런 노동적폐부터 없애기를.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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