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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향연] 아버지가 남긴 未完의 자서전, 한 편의 소설이 되다

바람아님 2018. 11. 26. 18:33

 
(조선일보 2018.09.13 권지예 소설가)


南北 엇갈린 가족의 운명 탓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 아버지… 23쪽에서 멈춘 자서전 남겨
16세에 아버지의 유품 본 작가, 이산가족 悲劇 그린 소설 완성… 이들의 恨 달래줄 방안 고민을


권지예 소설가권지예 소설가


슬픈 영화나 드라마에 웬만해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매번 눈물이 나는 인생 다큐 드라마가 있다.

매회 무대의 주인공들은 갈수록 고령(高齡)이다.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나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가슴 저미는 이벤트.

지난 8월 말에 금강산에서 두 차례 열린 21회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야기다.


평생의 기다림 끝에 70년 만에 상봉하는 사람들.

헤어질 때 네 살배기였던 아들을 단박에 알아보고 달려가 얼굴을 쓰다듬고 끌어안는 구순(九旬)의 어머니.

자신보다 일찍 죽은 아들 대신 며느리와 손녀를 만난 101세의 아버지.

생이별한 아내의 배 속에 있던 67세 딸을 생전 처음 만난 89세의 아버지.

70대 할머니들이 된 북의 두 딸을 만난 99세의 어머니. 형제나 남매들도 대부분 80 노인이다.


내 눈에는 자식이나 부모나 그저 다 노인이다.

딴에는 성장(盛裝)했으나 이가 빠지고 주름지고 꺼칠한 피부의 곤고한 얼굴.

노동으로 닳아빠진 손톱과 거칠고 늙은 손. 대체로 북쪽 사람들이 더 늙어보인다.

아비와 어미에게는 어린아이였던 자식들이 자신과 별다르지 않은 노인의 모습이 되어 있는, 이 기막힌 슬픔이 오죽할까.


꿈 같은 만남도 잠시, '안녕히 다시 만나요'라는 북의 노래 속에서 작별의 애끓는 눈물과 손짓.

'오래 살아 꼭 다시 만나자'는 이미 오래 산 노인들의 기약 없는 약속.

늙은 부모는 안다. 이게 마지막 만남과 이별이란 것을.

그래도 선발된 그들은 569대1의 경쟁을 뚫었으니 운(運)이 좋은 사람들이다.


간절하게 북의 아내와 자식을 평생 그리워했으나 생사도 모른 채 일찍 눈을 감은 기구한 운명의 아버지라면 어떻겠는가.

이산가족의 내밀한 아픔을 그린 김이정의 자전적 소설 '유령의 시간'은 그런 아버지의 인생에 바치는

오마주(hommage·프랑스어로 존경·경의라는 뜻)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사회주의자로 수배된 이섭은 자기 대신 갓난아기를 데리고 감옥에 갇힌 아내와 두 아들을 형에게 맡기고 쫓기고 있다.

아내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한국전쟁 중 신념을 좇아 월북한 그는 북한의 현실을 보고는 가족을 데려와 희생할 만한

체제가 아님을 깨닫고 목숨을 걸고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사이에 사회주의운동을 하던 형님 가족은 이섭의 두 아들을 데리고 월북하여 길이 엇갈려버린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재혼해서 사남매를 낳았지만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이섭은 전 부인을 호적에서

지우지 못하고 자식을 전 부인의 호적에 올린다.


'이제 서른,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되었을 아이들. 서해 바닷가에서 이섭은 얼마나 그 아이들을 기다렸던가.

눈동자 검은 아이들아, 이 아비에게 오너라. 부디 고무보트를 타고서라도 오너라.

이섭은 아이들을 기다리며 매일 새벽 해안가까지 뛰어가곤 했다.'

서해 바다에서 생업으로 새우 양식을 하는 이섭이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치면 북의 아들들이 간첩으로라도

넘어와 주길 기다릴까.


광복 30주년을 맞은 1975년 8월 15일 이섭은 사회안전법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회한 어린 일생을 기록하기 시작하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한 달 후 돌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첫 아내와 두 아들의 생존 여부조차 모르고 죽었다. 세월이 흐른 후 그의 딸 지형은 아버지의 헤어진 부인과 두 아들이

북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1975년에 멈추어버린 아버지의 미완(未完)의 자서전을 완성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유품인 23쪽에서 멈춘 자서전을 본 열여섯 살 때부터 자신이 작가가 될 운명을 감지했다고 한다.

작가의 아버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과 북으로 찢어진 자신의 가족에게 죄책감에 시달리며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았다.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어디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


우리 측 방문단 87%가 80대 이상이라 한다. 간절하고 절박한 1세대 고령층이 매년 4000명 이상 한(恨)을 품고 운명한다.

죽음에 순서가 없으니 2세대인 70대 이상 자식들도 오래 기다릴 수가 없다.

이제 시간이 없다. 유령의 시간을 몰아내고 사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핏줄의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만이라도 확대되어야 한다.
 


  





    유령의 시간 : 김이정 장편소설
    김이정/ 실천문학/2015/ 262 p
    813.7-ㄱ877유=2/ [정독]어문학족보실/  [강서]3층 어문학실



죽도록 잊고 싶은 기억과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진 한 남자 이야기


“어쩌면 아버지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어디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이정 소설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자 작가와 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유령의 시간』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껍질 속 북한의 현실을 보고 다시 남으로 내려온 남자와 그를 쫓아 뒤늦게 북으로 간 아내.

휴전선이 가로막아 가족을 품에 안을 수 없게 된 남자는 재혼해 사남매를 낳도록 전 부인을 호적에서 지우지 못하고

옛 가족과 새 가족 사이에서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남한 사회는 그를 사회안전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창살 속에

가두어 인간다운 삶을 앗아가버렸다. 아내와 두 아들이 간첩으로라도 다시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남자는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일생을 기록하기 시작하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다.

세월이 흐른 후 그의 딸은 아버지의 헤어진 부인과 두 아들이 북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1975년에 멈추어버린

아버지의 일기장을 꺼내 미완의 자서전을 완성한다.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북의 오빠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안부 편지에 ‘아버지는 평생 당신들을 그리워했습니다’라고 적는다.


“이 세상 모든 잠든 것들아, 어서 깨어나 나를 보아라.”


삶을 부정당한 한 인간의 기록


누군가 잠행을 계획했다면 더없이 좋을 새벽, 남자는 인적 없는 바닷가를 거닌다. 전쟁 시기, 사회주의자로 수배된

이섭은 자기 대신 감옥에 갇혀 소식이 끊긴 부인과 갓난아이, 형님에게 맡겨놓은 두 아들을 20년 넘도록 기다리고 있다. 한국전쟁 중 신념을 좇아 월북한 그는 막상 눈앞에 펼쳐진 북한의 현실을 보고 자신이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님을

깨닫고는 목숨을 걸고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사이 같이 사회주의운동을 하던 형님 가족과 함께

월북한 두 아들과 길이 엇갈려버렸다. 재혼해 사남매를 낳도록 전 부인을 호적에서 지우지 못하고 옛 가족과

새 가족 사이에서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이섭은 “분단과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정권을 안정시키고 연장하는 데만

이용해버린 남북의 정권”들이 보이는 기만의 제스처에 더 이상 헛된 기대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1972년의 정치 이벤트는 어느새 옛이야기가 돼버렸고, 정세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섭은 사회안전법 전문이 실린 신문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한여름인데도 오한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억센 손아귀가 목덜미를 꽉 누르는 듯 숨이 막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되지 못한 나라에서 30년을,

해방 후에는 북에 가족을 두고 이산가족으로 30년을 산 자신의 삶이 한없이 서글퍼졌다.


정치가 인간을 삼켜버린 유령의 시간
끝나지 않는 슬픔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


오랜 세월 이어진 남북 긴장 관계는 한반도를 지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겨두었다. 해방 70년을 맞이한 2015년에도

여전히 악화일로를 치닫는 분단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간혹 보이는 남북의 화해 제스처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가장 인도적인 행위’마저도 ‘가장 정치적인 사건’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그때마다 기댈 곳 없는

이산가족은 산산조각 난 희망을 가슴에 부여안고 하염없이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1970년대 초반 처음으로 남과 북 정권이 협상 테이블에서 만나 ‘남북한, 자주 평화 통일 원칙 합의. 서울 평양서

4반세기 첫 정치 협상. 7개항의 공동성명 동시 발표’라고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보도한 남북 회담을 했지만

정기적으로 추진하자던 이산가족 상봉은 이후 수시로 연기됐고, 오히려 유신체제라는 엄혹한 정치의 계절이

찾아왔다. 이섭은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만도 숨이 막혔다. 연좌제에 걸려 본인은 물론 사촌의

자식들까지 공직에 나가지 못했다. 10월 유신이 단행되고 계엄과 긴급조치가 번갈아 거리를 점령했으며,

사회안전법이 공포되자 20년간 어렵사리 일군 삶이 또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듯했다. 사상범을 재판도 없이

재수감할 수 있는 괴물 같은 법령이 남한 사회에서 활개 치자 더 이상 발 붙여 살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이섭은 해방 30주년을 맞는 광복절 아침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공포와 억압의 손아귀를 떨쳐버리지 못한 그는 돌연 뇌출혈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는 2015년……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는다.’

누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그의 낡은 책상에는 스물두 장 셋째 줄까지 쓴 미완의 자서전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30년 가까이 되던 어느 날, 지형은 아버지의 두 아들이 북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북작가대회의 일

원으로 방북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안부 편지를 보내며 ‘아버지는 평생 당신들을 그리워했습니다’라고 적는다.

하지만 편지가 그들 손에 전해질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사실을 며칠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그녀는 호텔 창밖을 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비명을 지른다. 오래전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는 1972년 어느 날의 신문이 들어 있었다.

신문의 1면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여기는 평양…… 가랑비가 오고 있다.’


아버지 이섭과 딸 지형의 시점이 번갈아 교차되는 이 소설은 못다 쓴 아버지의 자서전이자 딸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국가의 대결이 만든 비극을 개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불행한 남북 이산가족에게 이데올로기의 격랑이 안긴

참혹한 상처는 지금도 곪아터지고 있다. 휴전 60년이 넘도록 남과 북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들,

끊임없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그들의 운명이 잃어버린 가족과 자식들에게도 되풀이되고 있다.

싸운 시간보다 더 고통스러운 휴전의 시간이 계속되는 오늘날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창살 속에서

수형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노란 택시를 타고 온 손님들
새우 양식장
영석이네
흔들리는 것들
화투점
다시 길 위로
산12번지 시민아파트
해방촌
지우
사십계단
유령의 시간
작가의 말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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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칼럼] 영화 '출국'의 시국선언   (조선일보 2018.11.27)
아내, 두 딸 남긴 채 北 탈출한 오길남의 비극적 사연을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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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깨어나 "납북자 송환과 정치범 수용소 해체" 외쳐야


(요덕수용소의 어둠속으로 잠겨버린)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
오길남 지음/ 세이지/ 2011/ 303 p
818-ㅇ364ㅇ/ [강서]3층 어문학실

영화 "출국"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