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9.04.11. 23:43
깨진 병 조각이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다면? 당연히 다른 곳으로 피해서 걸을 것이다. 하지만 통각이 망가진 한센인들은 병 조각을 밟고 계속 걷다 발에 피가 나고 살점이 떨어지는 지경에 처한다. 눈앞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해 재앙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민은 김정은이 평화롭게 살자고 약속했다는 말을 떠올릴지 모른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자 말을 어찌 믿는가. 김정은 정권은 히틀러의 나치보다 나쁘다.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치의 광기도 동족을 죽이겠다고 전쟁을 일으키진 않았다. 북한처럼 주민들에게 거주이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지도 않았다. 히틀러가 자신의 형과 고모부를 살해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히틀러는 동족을 우월한 민족으로 추켜세웠지만 김정은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다. 백두혈통의 김정은만 최고존엄이고 2500만 주민은 그에 예속된 하급 존재다. 그런 악인을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판문점 회담 후 김정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77.5%까지 치솟았다. 살인자 김정은을 위인으로 추앙하는 현상마저 벌어진다.
대한민국 안보를 떠받치는 국방과 외교의 두 기둥은 균열이 갔다.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란 용어가 사라지더니 장병 정신교육은 단체활동으로 변질됐다. 군 고위층은 북한군과 친하게 지내자며 악수할 생각만 한다. 최전방 감시초소(GP) 부수는 일을 무슨 치적처럼 떠벌린다. 수뇌부(首腦部)가 아니라 무뇌부(無腦部)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의 위험에 대처하려면 때론 과거의 적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외교다. 정부는 거꾸로 한다. 현재의 적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서 과거의 적에게는 묵은 상처를 헤집는다. 한·일 외교는 붕괴됐고, 한·미동맹은 삐걱거리는 소리로 요란하다.
위기 앞에선 싸우던 국민도 하나로 뭉치는 법이다. 그러나 이 땅에선 국가는 하나지만 국민은 둘이다. 적폐몰이 수사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고, 국론은 찢어졌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국민 편 가르기였다”고 손가락질하던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한다. 우리를 해치려는 북한에 미소를 보내면서 같은 국민에게는 왜 칼을 휘두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는 930여회의 외침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까. 그것은 안보를 가벼이 여긴 우리의 과보일 것이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조정에서 전쟁에 대비해 성을 보수하라고 지시하자 한 양반이 유성룡에게 편지를 보내 비난했다. “왜적이 날아서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왜 쓸데없이 성을 쌓아 백성들을 고단하게 하나.” 지금 우리의 안보의식이 그때보다 나은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11일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북핵문제를 논의했다. 우리가 지키지 않은 나라를 우방국이 대신 지켜줄 리는 없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망가진 위험감지 능력을 복원하는 일이 화급하다. 깨진 병 조각이 바닥에 즐비한데도 인지하지 못한다면 피가 나고 살점이 뜯기는 국가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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