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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한 동물들'/[조일훈 칼럼] 진보의 도덕적 고지는 무너졌다

바람아님 2019. 4. 11. 09:00

[태평로]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한 동물들'


조선일보 2019.04.10. 03:15

 

지난 2년 現정권의 권력 행사.. 국민 아닌 '자기 편'만 위한 것
완장차고 자아도취 빠진 그들.. '내로남불' '코드인사' 끝 안보여
김광일 논설위원
우리는 현 정부를 겪을 만큼 겪었다. 2년 동안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끌어가는지 패턴을 알게 됐다. 맨 위에 ①'사람이 먼저다'가 있다. 슬로건인 듯 행동강령이다. 책도 나왔다. 이때 '사람'이란 헌법에 나오는 일반 국민이 아니다. '정권에 표를 모아온 이너서클' '자기편'을 말한다. 이 '사람'은 '기업'보다 먼저요, 또 '현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보다 먼저다. 저들은 이 강령을 ②'주류 교체'를 완성할 때까지 밀고 갈 것이다. 사회 곳곳에 'B급'들이 'A급 엘리트'를 누르고 올라서는 세상, 다시 말해 저들만의 ③'사람 사는 세상'을 뜻한다.

실천 세목으로 몇몇 방책을 쓴다. ④'친일 청산' ⑤'적폐 청산' ⑥'과거사 진상조사'다. 저들은 '역사'를 무기 삼는다. 완장을 차고 정치적 황홀에 빠져 청산의 채찍을 휘두른다. 정의를 앞세운 자아도취 속에서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있는 것처럼 들뜬다. '소년십자군 증후군'이나 '홍위병 신드롬'이 21세기 한반도에서 재현된다.

이것만으로 저들의 포트폴리오가 완성되지 않는다. ⑦일자리 상황판 ⑧소득 주도 성장 ⑨최저임금 인상 ⑩탈(脫)원전 ⑪4대강 보(洑) 해체 ⑫강남 집값 파괴 같은 정책을 동원한다. 조지 오웰은 책 '동물농장'에서 말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여기서 '동물'을 '사람'으로 바꿔 놓으면 절묘하다. 최저임금 인상에 잠시 환호했던 '평등한 동물들'은 황금 집을 세 채씩 갖고 있는 '더 평등한 동물'이 있다는 걸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경제 원리를 무시하는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은 현 정부가 추구하는 목표에서조차 자꾸 뒷걸음치는 결과를 낳았다.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이란 헛꿈을 깨는 순간 멈춰야 옳다. 그러나 누구 좋아하라고 그러겠는가.

지금 청와대 '일자리 상황판'에는 뿌연 먼지가 내려앉았을 것이다. 균등한 소득 분배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다"는 마르크스 주장과 비슷해진다. 결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높일 뿐이다. 고임금 고용을 보장받는 대기업 노조 역시 '더 평등한 동물' 그룹을 형성한다. '저소득층 동물들'과 중소기업은 희생된다. 소득 분배는 나빠지고, 빈부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지고, 구조조정과 기술 혁신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정권은 국회의 청문과 동의가 필요한 자리에도 ⑬'코드 인사'를 밀어붙인다. 과거에도 '국정 철학'을 공유한다는 무리가 권부를 장악하곤 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이지 않았다. '더 평등한 동물'들끼리 파이를 요리하는 데 코드가 어긋난 동물이 끼면 불편하다.

정권은 ⑭'한반도 비핵화'라는 오디오-비주얼 환각 장치를 마련한다. 문재인·김정은⇨김정은·트럼프⇨트럼프·문재인, 이렇게 돌아가는 세 정상 조합의 쇼 무대가 1년에 두세 번 열린다. 캐스팅이 진부하지만 앰풀 효과는 있다. 북핵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관리'한다. 북핵 폐기가 목표인 척하면서 사실은 "임박한 핵 위험을 완화시켰다"며 위약(僞藥) 주사를 놓는다. 어쩌면 '북핵'도 '경제'도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제도권에서 쫓겨나 유튜브로 망명을 간 레지스탕스 정치 세력은 본질적으로 산재(散在)한다. 결집력 제로다. 지난 4·3 보선에서 봤다. 여러 당이 뭉치는 보수 결집은 과거 수십 년 그래 왔듯 내년 총선에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총선 전까지 인기 정책을 융단폭격처럼 쏟아낼 것이다. 여차하면 '관제 시위대'라는 지상군도 거리에 투입할 수 있다. 누구든 낙관하면 가짜다. 참고로 '더 평등한 동물들'의 별명은 ⑮'내로남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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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훈 칼럼] 진보의 도덕적 고지는 무너졌다

한국경제 2019.04.10. 00:33

 

착한 척, 정의로운 척, 잘난 척
국민 기만한 진보의 거짓과 위선
양심의 소리 들어야 도덕성 회복


도덕이나 이타심은 진화의 산물이다. 만약 도덕성이 개인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도덕성이 높은 사람은 생존경쟁에서 도태됐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양심의 가책’이 인간을 안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다. 양심의 가책은 육체의 통증과 비슷한 것이다. 일종의 경고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이 사고나 질병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듯이 도덕심이 약한 사람들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빠져든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번에도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조 수석을 바꾼다고 문재인 정부의 인선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진보와 정의를 앞세운 인사들의 면면은 그렇게 도덕적이지 않았다. 과거 보수정권의 고위 공직자들은 병역기피, 원정출산, 직권 남용, 부동산 투기와 탈세 등으로 질타를 받았지만 이 정부 사람들은 여기에 거짓말과 위선, 성추문을 보탰다.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를 초등학생들이 알게 됐을 정도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반대 진영에 날선 비수를 날렸던 김경수 김기식 김의겸 손혜원 안희정 이유정 이재명 등은 잇따라 낙마를 하거나 명예에 금이 갔다.


그들이 정의라는 도덕적 고지를 점령한 것은 본연의 윤리적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상대적이고 반사적인 것이었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보수정부는 눈부신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 독재와 부정으로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보수의 이념적 가치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치명적 내부 분열로 자멸하고 말았다.

진보진영은 이런 보수를 공격하면서 손쉽게 도덕적 우위를 확보했다. 스스로 정의롭다는 착각에 빠진 ‘강남좌파’들이 그 깃발에 몰려들었다.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모습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특권층의 결탁과 공생을 타파하겠다고 하지만, 이젠 진보진영도 이들 단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공공기관에 일제히 떨어진 수백 개의 낙하산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편의 허물은 감싸고 상대는 잔혹하게 밟아버리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결탁과 공생 아닌가. 국민들은 더 이상 ‘착한 코스프레’에 속지 않는다. ‘내 자식, 내 재산, 내 자리’ 챙기며 살았으면서도 ‘착한 척, 정의로운 척, 잘난 척’하며 떠들어온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과거 삼성의 한 계열사 사장은 남 몰래 포르쉐를 몰고 다녔다. 그는 가끔 심야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30여 년의 월급쟁이 생활을 거쳐 사장까지 올랐으니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사코 숨기려 들었다. “여기저기에 너무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게 정상이다. 나는 김의겸의 상가 매입이 타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50대 가장으로서 결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진보를 대변하는 가장 높은 고지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진보진영은 무단으로 점령한 도덕적 고지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똑바로 보인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1만원도 못 주면 어떡하느냐”(유시민, 김제동)는 주장은 정의를 가장한 악의적 선동이자 영세 사업자들을 향한 모욕이다. “니들 아버지는 뭐 했느냐”(손혜원)는 욕설은 온갖 무리를 해가며 부친을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린 공직자가 할 소리가 아니다.

양심의 통각이 사라지면 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가 위험해진다. 한국은 경제적 실패가 아니라 도덕성 추락으로 먼저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미 살아버린 인생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옷깃은 다시 여며야 하지 않겠는가.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