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2006년부터 해마다 누리꾼들이 투표로 뽑은 '올해의 한자(年度漢字)'를 발표한다. 2013년의 한자로 '나아갈 진(進)'이 뽑혔다. 이제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겠다는 중국의 포부와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 거침없는 발걸음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미세 먼지를 일으킬지 바로 옆 이웃 나라로서는 적이 불편하다.
'나아갈 진(進)'과 더불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근대 문명이 동아시아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온갖 학술 용어를 세심하게 번역해준 일본의 공은 결코 적지 않지만 'evolution'을 '진화(進化)'라고 번역한 것은 지극히 경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아도 진화가 진정 진보(進步)의 과정인가에 대한 논박이 끊이지 않았건만 어쩌자고 떡하니 '나아갈 진(進)'을 붙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진보의 개념은 목적을 내포한다. 하지만 생물의 진화에는 목적성이나 방향성이 없다. 다윈은 원래 'evolution'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기 꺼렸다.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였기 때문이다.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복잡한 생물들이 대체로 단순한 생물들로부터 진화한 것은 사실이나 모든 단순한 생물의 구조가 언제나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전보다 복잡한 생물들도 등장한 것이지 모든 생물이 죄다 복잡해지는 방향성을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다.
2002년에 타계한 하버드대의 고생물학자 굴드(S J Gould)는 그의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진화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출현을 위하여 기획된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만일 우리가 지구의 역사를 담은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찍는다면 마지막 장면에 인간이 또다시 등장할 확률이 얼마인가 묻고는 스스로 영(0)에 가까울 것이라고 대답한다. 인간을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운 것도 아니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어댄 것도 아니다. 인간은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