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한 은행에서 궤짝에 넣어 놓은 우리 돈 2억5000만원어치의 루피 지폐를 흰개미가 먹어 치웠다는 뉴스가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흰개미는 워낙 식물성 섬유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를 먹고 사는 곤충인 만큼 나무로 만든 지폐는 그들에게 그저 맛있는 음식일 뿐 돈을 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결과는 같을지 모르지만 전산망을 해킹하여 농협의 금고를 턴 인간들과는 근본적으로 죄질이 다르다.
흰개미는 흰색 개미가 아니라 오히려 메뚜기와 바퀴벌레에 훨씬 가까운 곤충이다. 나는 '민벌레(Zoraptera)의 진화생물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박사 과정을 시작하던 1980년대 초반에는 흰개미의 가장 가까운 사촌이 민벌레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흰개미가 어떻게 사회적 동물이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민벌레를 연구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내가 학위를 마치기도 전에 흰개미는 다름 아닌 '사회성 바퀴벌레'라는 주장이 제기되더니 이제는 아예 흰개미를 바퀴벌레의 일종으로 분류하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강원대 박영철 교수가 연구하는 갑옷바퀴가 바퀴벌레 중에서도 유전적으로 흰개미와 가장 가까운 걸로 나타나고 있다.
작가 김재일은 '산사의 숲, 초록에 젖다'에서 부산 금정산에 있는 범어사 일주문의 기둥은 원래 나무였는데 조선 숙종 때 명흡대사가 돌기둥으로 바꾼 것이라며 아마 흰개미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리했으리라 적었다. 박영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 흰개미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일본 혼슈와 규슈 흰개미와 단 1개의 염기만 다르다. 이는 흰개미가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가 매우 최근이라는 증거인데 과연 그 시기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곤충학자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흰개미는 철도의 침목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흰개미가 한반도에서 산 역사는 기껏해야 100년 정도인데,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실로 놀랍게 성장하여 어느덧 심각한 해충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21.8%에 달하는 목조 문화재가 현재 흰개미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단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노을을 바라보시던 고 최순우 선생님이 애처롭다.
(출처-조선일보 2011.04.25.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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