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8.19 최보식 선임기자)
김도연 前 포스텍 총장
대학 총학생회가 "5점 만점 중 4.26점의 정책 지지를 얻고 있는 그를 총장으로 재추천하지 않은 결정은 쉽게 납득 안 된다"라는
대자보까지 붙였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총장추천위원회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있었다.
김도연(67) 전 포스텍 총장은 요즘 세상에서 드물게 이처럼 구성원들의 신망을 받으며 물러났다.
무기재료공학을 전공한 그는 서울대공대 학장,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울산대 총장, 국가과학기술위원장 등을 거쳤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대화할 수 있었다.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은 "조국씨는 적어도 정직한 모습은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일본의 소재 부품 수출 규제에 맞서 포스텍도 중소 업체들의 국산화 개발에 적극 기술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국민 정서상 동참 선언이었지, 소재 부품 국산화가 1, 2년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시장을 이기는 공장은 없다.
시장이 움직여야 공장이 따라간다. 일본 소재 부품은 가격과 품질에서 확실한 비교 우위에 있었다.
이를 무시하고 국산화를 밀어붙이면 우리 제품 가격이 올라가고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
―아베 총리가 자유무역 질서와 국제 분업 체제를 건드려 우리 정부로서는 자구책으로 내놓은 것인데?
"소재 부품 국산화에 관심을 갖는 계기는 되겠지만, 그럼에도 정부가 나서기보다 기업에 맡겨야 한다.
여당 원내대표는 '소재 부품 기술은 일본보다 1.9년 뒤졌다'고 했는데 대체 어떤 계산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가 1.9년까지 뒤쫓아가면 일본은 그대로 멈춰 있나."
―우리가 TV·반도체·디스플레이 등에서 일본을 추격해냈지 않나?
"하지만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한 장비는 대부분 일제(日製)다. 그 장비에 맞춰 소재와 부품도 만들어진다.
삼성 반도체는 이런 일제 장비를 잘 활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을 빠른 속도로 쫓아갔으나 여전히 기술 연륜(年輪)의 격차가 크다."
―그 연륜의 격차라는 게 어느 정도인가?
"일본은 1877년에 공과대를 이미 만들었다. 그때부터 엔지니어를 길러냈다. 우리는 1950년대 시작했다.
일본이 기술 투자를 한 햇수는 140년이고, 우리는 70년이라는 뜻이다.
가령 100년 된 일본 중소기업이 만드는 소재 부품은 그 기술을 그대로 모방해도 똑같이 못 만든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우리가 아직 일본에 배워야 할 게 많다."
―이런 파탄 상황으로 몰고 온 단초는 작년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1965년 한·일 협정 체제를 흔드는 예민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는 더 겸허해야 한다.
우리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라"는 식으로 일본에 훈계조 발언을 하면서 파국으로 끌고 갔다.
이에 경제 제재로 보복한 아베 총리의 문제도 있지만, 우리 쪽에서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컸다.
정부는 자신이 초래한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하고, 대신 '죽창가' 등으로 선동해 국민을 앞세웠다.
반일 감정에 올라타 소재 부품 국산화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시대적 과제처럼 됐는데?
"국민 정서상 소재 부품 국산화 개발을 반대할 수 없게 됐다. 이번 추경(追更)에서 막대한 예산이 책정됐다.
하지만 국민 세금을 집어넣어 개발한 소재 부품 국산화가 국제 경쟁력을 못 갖추면 엄청난 낭비다.
무엇보다 국산화 개발에 착수했는데 한·일 관계가 회복돼 수출 규제가 풀리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게 돼도 일본 소재 부품을 과연 안 쓸 건가."
―눈앞의 경제적 피해도 심각하지만, 이번 사태가 국가 장래에 끼칠 손실은 훨씬 더 크다.
한·일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게 혹 잠재돼 있는 편견과 의심, 적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상대방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즐겨왔다.
그런데 기성세대의 정치 놀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왜곡된 반일 감정을 심게 된 것이다.
이는 장래의 국익을 엄청나게 해친 것으로 본다. 상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면 이런 관계까지 안 갔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 우익의 혐한(嫌韓) 발언에 분노하지만, 우리의 반일 발언이 일본인에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는 둔감하다.
"이번 사태는 과거사를 반성하며 한국의 입장을 이해해온 일본인들도 많이 등 돌리게 만들었다. 개인이 이웃과 관계가
안 좋으면 행복할 수 없듯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사 갈 수도 없지 않나."
―문 대통령이 집권한 뒤로 나라가 대란(大亂)을 겪는 것 같다.
안보·외교·경제 등 어느 하나 온전한 데가 없다. 왜 이런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다고 보나?
"현 정권은 전문가 얘기를 듣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지식과 경험의 전문가를 '청산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과학적 마인드와 실용적 사고 대신 시대착오적 이념이 집권 세력을 지배하는 것 같다.
내놓는 정부 정책마다 현실과 유리되거나 퇴영적인 것들인데?
"아마 대표적인 사례가 '탈원전' 정책인데, 원자력을 제대로 공부한 전문가보다 시민운동을 한 사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70여년 연륜을 가진 기간산업인 원전을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신규 원전 인력이 끊겼다. 원전은 계속 안전하게 돌려야 하는데 기존 인력이 은퇴하면 원전 안전 문제가
정말 발생할 것이다."
김도연 前 포스텍 총장(오른쪽)
―문 대통령이 원전 재난을 다룬 만화 같은 영화 '판도라'를 보고는 탈원전 신념을 갖게 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식의 위험 걱정 때문이라면 고속철이나 비행기는 어떻게 타고 다니나?
"극한·첨단·거대 기술이라는 게 굉장히 위험하지만 그런 기술에서 국부(國富)가 창출된다.
원전을 유독 위험하게 여기는 것은 이를 '원자폭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 과학 신기술은 전쟁을 통해 출현하고 발전해왔다. 석기에서 청동기시대로 간 것이 인명 살상용
도검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쇠붙이를 안 쓰고 돌을 계속 쓸 것인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쓰나미에 의해 침수된 지하 발전기가 작동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지
폭발 사고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원전은 언제든지 폭발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다.
"원전과 원자폭탄은 구성 원리가 다르다. 원자폭탄에는 동위원소를 농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반면 원전은 핵분열반응이 매우 천천히 일어나도록 동위원소 농도를 4%로 제한한다.
원자폭탄이 100% 알코올이라면, 원전은 4도짜리 맥주 급이다. 맥주는 불붙거나 폭발하지 않는다.
게다가 원전 안전성 확보를 위한 기술은 갈수록 발전해오고 있다.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문재인 정권은 위험한 원전을 안 쓰겠다는 쪽을 택했다."
―한 해 수조원대 이익을 내던 초우량 기업 한전이 '탈원전 정책' 여파로 적자의 수렁에 빠졌다.
그런 한전이 에너지 특화 대학인 한전공대를 세우겠다는 것은 정말 '코미디' 아닌가?
"이공계 대학은 돈 먹는 하마다. 막대한 투자 없이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세계 명문 공과대학은 대부분 국립이다.
유럽·일본에도 이공계 사립대학은 없다.
미국의 MIT, 칼텍, 스탠퍼드대학은 미국만의 동문(同門) 문화와 전통이 만들어낸 것이다.
작년에 MIT가 'AI(인공지능) 단과대'를 설립할 때 1조1000억원을 들였다.
한국에서 포스텍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절 박태준 회장의 의지로 포스코가 압도적 지원을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한전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한전공대는 문재인 후보의 대선 공약이었다.
한전의 경영 적자가 엄청난데도 이 사업을 의결한 것은 내년 총선용이라는 지적이 있다.
"대통령의 공약이라 호남 지역에 꼭 세워야 한다면 전남대나 전북대, 광주과학기술원 안에 단과대로 설치하는 게 낫다.
독립 대학으로 세우면 천문학적 경비가 들 뿐 아니라 교육 측면에서도 안 좋다.
학생에게 에너지만 교육시킬 수는 없다. 인문사회교육도 해야 하는데 교수들을 어떻게 모두 채용하겠나."
―최고의 에너지 대학이 되려면 우수 학생들이 가야 하는데, 이미 전국에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만 카이스트, 포스텍,
대구경북과기원, 울산과기원, 광주과기원 등 5곳이 있다.
"나라가 어려운 시절에 세운 포스텍에는 장학금을 원하는 수재들이 몰렸다.
지금은 어느 이공계 대학에 가도 장학금을 받는다. 학생들은 수도권을 선호한다."
―과거와 비교하면 요즘 대학생의 실력은 어떤가?
"좋은 대학일수록 정육면체로 잘 깎인, 소위 정형화된 학생들이 들어오는 것 같다.
초등학교부터 12년간 한눈팔면 대학에 못 들어오기 때문이다.
말로는 '창의성 교육'을 떠들지만 현재 대입 수능 제도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 내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비판이 많은데?
"지금 세상은 컴퓨터 엔지니어가 많이 필요하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경우 정원 40%가 컴퓨터 학과다.
하지만 서울대의 경우 컴퓨터 학과 정원을 한 명도 더 못 늘린다.
우리 대학에는 전체 정원이 정해져 있어, 결국 학과(學科)끼리 늘이고 줄여야 하는데 어느 학과도 자신의 정원 수는
줄이려 하지 않는다. 대학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렇게 폐쇄적이고 경직돼 있다."
―어느 시기부터 대학교수가 정치판 주변으로 모여드는 게 일상적 모습이 됐다.
과거에는 이를 '어용 지식인' '폴리페서'로 분류했는데, 요즘에 이들은 자칭 '참여 지식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수의 도덕성이 일반 사람보다 나을 리 없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이라 스스로 경계하는 면은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뻔뻔함을 보면서 그런 막연한 기대도 접었다.
"대선 철이 되면 캠프마다 교수 1000명씩 동원되니, 우리 사회가 대학을 신뢰하겠나.
학생은 교수에게 지식만 전수받지 않는다. 삶의 자세도 배우는 것이다.
조국씨는 적어도 정직한 모습은 보여야 한다."
'時事論壇 > 時流談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호원칼럼] 창파에 뜬 돛단배 나라/[김세형 칼럼] 평화경제 진짜 해보면 한국 어떻게 될까 (0) | 2019.08.21 |
---|---|
[만물상] 北 '씨앗 공작' (0) | 2019.08.21 |
[에버라드 칼럼]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영구 중단될 수도 있다 (0) | 2019.08.18 |
[만물상] 죽음의 계곡 (0) | 2019.08.17 |
[박보균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김구는 보수우파..좌파가 교란한 정체성 복원하라 (0) | 2019.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