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9.05 이주희 EBS PD·'생존의 조건' 저자)
이주희 EBS PD·'생존의 조건' 저자
고선지, 흑치상지, 최치원. 세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으로 먼 이국인 당나라에서 크게 출세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이 시대에 당나라에서 출세한 선조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꼭 우리만은 아니다.
우리에 비해 당나라와 교류가 적었던 일본조차 그런 인물이 있다. '아베노 나카마로', 중국식으로 '조형'이라는 사람이다.
최치원처럼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간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서 과거에 급제한 후 당 현종의 황자를 모셨으며
유명 문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나이 들어 고향이 그리워진 조형은 귀국길에 올랐는데 배가 풍랑을 맞아 난파하고
말았다. 난파 소식에 조형이 죽었다고 생각한 이백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남겼을 정도이니,
시선(詩仙) 이백과의 교분도 꽤 두터웠던 듯하다.
일본만이 아니다. 이 시대에 동아시아 전체에는 이런 일화가 흔하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설인귀는 거란족이고 신라와의 전쟁에서 당군을 지휘한 이근행은 말갈족이며
안녹산의 난으로 유명한 안녹산은 이란계 소그드인이다.
이쯤 되면 실제로 대단한 존재는 우리가 아니라 당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민족 출신의 많은 인재가 모두 당나라에서 기회를 얻었고 당나라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국에서 출세한 우리 민족을 자랑스러워하는 전통은 요즘도 여전하다.
세계은행 김용 총재나 프랑스 상원의원인 장뱅상 플라세(한국명 권오복) 같은 이들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증거로 거론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 경우도 이들이 어느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당나라의 경우처럼 정말 대단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존재는 타국에서 출세한 우리 민족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출세한 타국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時事論壇 > 橫設竪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재의 新대권무림] 586 천적은 나..조국 나와랏, 부산서 붙어보자 (0) | 2019.09.06 |
---|---|
[기자의 시각] 軍 무기, 자부심이 무너진다 (0) | 2019.09.06 |
[시론] 법꾸라지 전성시대 (0) | 2019.09.05 |
[만물상] 절박한 홍콩 '1020 세대' (0) | 2019.09.04 |
[만물상] 치솟는 금값 (0) | 2019.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