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신화’가 있다. 오래 전에는 유대인에 이어 두번째라고 했는데 2000년대 들어 세계 1위로 순위가 올라갔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이 철석 같이 믿고 있다.
인터넷에는 ‘한국이 평균 IQ 105를 넘는 유일한 나라’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1998년 영국에서 출간된 ‘한국인을 말한다(영문 제목은 The Koreans)’는 책이 출처라고 한다. 저자는 더 타임스(The Times) 서울 특파원으로 한국에서 15년간 활동한 마이클 브린이다. 그가 책에서 한국인의 장점으로 열거한 30여개 항목 중 첫번째가 IQ라는 것이다.
하지만 브린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에 대한 달콤한 찬사보다 따끔한 지적과 조언이 많다. 브린이 언급했다는 한국인의 장점들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짜 뉴스다. 외국 언론인도 인정한 사실이라고 하면 더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명백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신뢰도가 낮은 다른 근거도 있다. 영국 얼스터대 교수를 지낸 리처드 린이라는 학자의 책이다. 린은 2002년에 발간한 ‘IQ와 국부(Wealth of Nations)’에서 전세계 185개국의 평균 IQ 자료를 제시했다. 홍콩이 107로 1위, 한국이 106으로 2위였다. 그때부터 국내에서 국가 순위로는 한국이 1등이라는 해석이 나돌기 시작했다.
린은 학계에서 거의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어 인종주의자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는 허접하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국가별 평균 IQ를 집계했다. 여러 IQ 테스트 결과를 짜집기했고, 아예 통계가 없는 104개국에 대해서는 주변 국가의 IQ로 추정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자료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린은 유럽인의 IQ에 관한 논문에서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평균 IQ가 107로 공동 1위, 폴란드가 106으로 3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사시점과 대상, 방법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IQ와 국부’만 줄곧 인용된다. 다른 학자들의 반론과 이론(異論)은 무시당하고 있다. 맹목적 애국심을 가리키는 이른바 ‘국뽕’의 한 단면이다.
정부가 최근 ‘인공지능(AI) 국가 전략’을 발표했다. ‘지금 세계는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산업과 사회(삶) 전반에 걸친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를 맞고 있다’며 ‘변화의 속도와 폭이 더 빨라지고 광범위해질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범국가 차원의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고 취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전략의 4개 특징 중 하나로 ‘우리 국민의 지적 우수성을 토대로 어릴 때부터 쉽고 재미 있게 SW(소프트웨어)와 AI를 배우고, 전 국민이 AI 기초 역량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세계 최고의 AI 인재가 성장하는 토양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지금까지 정부 정책에 ‘우리 국민의 지적 우수성’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사례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정부가 이렇게 대놓고 한국인의 머리가 좋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국가 공식 문서에 담기 민망한 주장일 뿐 아니라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다.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집어넣은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국가 전략에서 국뽕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2030년까지 ‘디지털 경쟁력 세계 3위’ ‘삶의 질 세계 10위’라는 목표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디지털 경쟁력 10위, 삶의 질 30위라고 한다. 의욕적인 목표를 제시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괴리감이 너무 크다.
정부는 이번 전략의 수립 배경 중 하나로 ‘세계 주요국들이 글로벌 AI 주도권을 선점하고, AI로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가 우리보다 먼저 AI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이다.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한국이 10년만에 디지털 경쟁력을 10위에서 3위로, 삶의 질을 30위에서 10위로 끌어올리는 게 가능한 일인가. 부모들이 "우리 아이는 머리가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금방 성적이 오를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쩐다고 하는 말 그대로다.
정부가 지난 10월에 내놓은 ‘미래자동차 산업 발전전략’도 비슷하다. ‘미래차 경쟁력 세계 1등’ ‘완전 자율주행 제도 세계 최초 완비’ ‘완전 자율주행 세계 최초 상용화’ 등 현실성이 떨어지는 구호가 수두룩하다. 한국이 뛰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낮잠만 잘 것으로 기대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한국인의 지적 우수성 덕분에 선두와의 격차를 순식간에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인가.
‘세계 최초’나 ‘세계 1위’에 대한 집착과 허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정부도 무슨 비전이나 전략을 내놓을 때마다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성과를 낼 것처럼 큰 소리치고 허풍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일수록 사후 관리가 엉망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면 새 비전과 전략이 등장하고, 기존 계획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되풀이됐다.
정부가 특정 산업이나 제품을 세계 1위로 키워낸다는 것 자체가 오만한 발상이다. 개발연대 시절이라면 모르겠지만 거창한 수치 목표로 국가 전략을 포장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는 없다. 이제는 국가 전략을 ‘국뽕’ 판타지로 버무리는 시대착오적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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