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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수요일 밤의 대학살'

바람아님 2020. 1. 10. 18:41

(조선일보 2020.01.10 안용현 논설위원)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리처드슨 법무장관을 긴급 호출했다.

'워터게이트 도청(盜聽)' 수사로 자신의 목을 조여오던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것이었다.

법무장관이 "특검 수사에 개입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법무차관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차관보가 마지못해 대통령 지시를 따르면서 하루 만에 특검·장관·차관의 목이 전부 날아갔다.

언론은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불렀다. 국민 분노가 폭발했다.

'도청은 모르는 일'이라고 버티던 닉슨은 이듬해 8월 의회 탄핵 투표를 앞두고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의혹을 파헤친 워싱턴포스트는 "닉슨을 끌어내린 건 도청이 아니라 은폐였다"고 했다.


▶닉슨의 탄핵 소추 사유는 사법 방해와 권한 남용이었다.

미 형법에서 사법 방해는 "법과 정의의 정당한 집행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위증이나 증거 훼손, 수사·재판 압력 등이 해당하는데 5년 또는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하는 중대 범죄다.

미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 탄핵 사유에 들어간다.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오른 것도 '성 추문' 본안이 아니라 특검 수사에서 저지른 위증과

사법 방해 때문이다. 원래 저지른 범죄보다 사법 방해가 더 무겁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러시아 내통 의혹을 수사하던 코미 FBI 국장을 전격 해임하자

언론은 "화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 했다. 닉슨처럼 사법 방해로 탄핵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할 뮬러 특검이 임명되자 트럼프는 "내 대통령직도 끝났다. X 됐다"고 낙담했다.

제멋대로 하는 트럼프이지만 특검을 자르지는 못했다. 하야 성명을 읽던 닉슨의 초라한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제 밤 법무부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을 수사하던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족을

쳐내는 인사를 단행했다. 팔 하나는 부산으로, 다리 하나는 제주로 멀리 날려버렸다.

대통령으로 향하던 검찰 수사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수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 부를 만하다.


▶탄핵 위기에 몰린 미 대통령 4명 중 3명이 사법 방해 혐의를 받았다.

주권자가 용납할 수 없는 대통령의 최악 범죄가 자기 비리 수사를 방해하는 행위라는 의미다.

그런 권력자는 내쫓을 수 있다는 게 미국의 법치(法治) 전통이다.

견제 장치를 제거했다고 믿는 권력은 폭주하기 마련이다. 지금 한국이 그리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