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1.18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요즘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아무래도 '차 한잔'으로 시작하는 말이다.
집에서 혼자 마신다 해도, 기왕이면 머그 컵 말고 예쁜 손님용 찻잔을 꺼내고,
티백 말고 잎 차를 우려 마시며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힌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서 주인공은 찻물을 따르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더운물과 차가운 물 소리가 다르다. 찬물은 경쾌하게, 더운물은 뭉근한 소리가 난다."
비 오는 여름, 그녀는 창밖을 보며 "장맛비 소리가 가을비 소리와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키키 기린'은 주인공의 다도 선생님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가 유작이 되었다.
좋아하는 배우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마음이 더 애틋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오랜만에 고향 집에 온 아들이 현관에 들어서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엄마가 부엌에서 나오며 이렇게 말한다.
"다녀왔습니다라고 해야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함께 있는 엄마 마음이 느껴져서 어떤 포옹보다
그 말이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먼 곳을 나서면 언제나 '이곳을 떠난다'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먼저다.
여행은 내게 늘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빗소리를 듣는다. 오감을 이용해 온몸으로 그 순간을 느낀다.
눈 오는 날은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느낀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 '일상다반사'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일일시호일'은 매일매일이 좋다는 뜻이다.
'일일시호일'을 내 멋대로 해석하면, 여름은 더워서, 겨울은 추워서 좋다는 뜻 아닐까 싶다.
가을은 단풍이 지천이고, 봄은 꽃으로 피어나니 좋다는 뜻 말이다.
매일이 소중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겨울은 추워서, 여름은 더워서 싫다고 말한 사람과 같을 리 없다.
싫어할 이유를 찾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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