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2.18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美, 영국 대신 패권 국가로 등장한 이후 전쟁 없이 경쟁자들 물리쳐
가장 강력한 힘은 패러다임을 바꿀 능력
21세기는 여전히 중국 아닌 미국의 것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요즘 구한말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서울 한복판에서 열강 대사들이 활보한다.
그들의 동정 하나 말 한마디에 언론이 춤춘다. 위안스카이·데라우치·알렌이 부활한 느낌이다.
어느 선진 국가에서 우리처럼 대사 동정이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열강에 휘둘리며 망해가던 구한말 조선과 동격은 아니지 않은가?
세계 금융 위기로 미국 경제가 휘청거릴 때,
우리 사회에는 명·청 교체기에 비유하면서 중국을 택해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되었다.
역사상 중국의 영향을 잊고 살았던 예외적인 60여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중국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교역·교류·먹거리에서 미세 먼지,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상은 싫든 좋든 중국과 연관되어 있다.
시진핑 주석의 방한 여부에 정치권은 울고 웃고 한다.
청일전쟁 이래 130년 가까운 외도를 끝내고 다시 중화 조공질서로 복귀하는 것이 우리의 순리인가?
중국은 힘·잠재력 모든 면에서 대단한 나라다.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은 '21세기는 중국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을 의외로 잘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21세기는 여전히 미국의 것'일 것이다.
중국이 위대하지만 미국이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힘은 무엇인가? 미국은 이민 국가로서 다양함을 포용하여 하나로 녹여내는 용광로 같은 나라다.
청교도들은 근면하고 실용적인 미국 문명의 기초를 만들었고 유대인들은 세계 금융을 장악하는 노하우를 제공했다.
중국인들은 광활한 철도 인프라를 깔았다. 혁신의 애플을 만든 사람은 시리아계 스티브 잡스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동성연애자도 유력 대통령 후보가 되는 나라다.
로컬 영화제라던 아카데미에서 한국 영화가 상을 석권했다.
미국은 다양함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강점으로 만들어내는 힘을 갖는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힘이다.
미국이 정말 무서운 점은 실패는 있지만 동일한 실패를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 태평양함대는 괴멸적 타격을 입는다. 일본은 여세를 몰아 미드웨이 공격을 감행한다.
전력에서 절대적 열세였던 미국은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예측하고 철저히 준비하여
일본 연합함대를 괴멸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다.
일본 제로센 전투기는 당시 최고 속도와 강력한 화력을 지닌 세계 최강 전투기였다.
미국은 제로센을 철저히 분석, 방어력이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전술을 개발하여 격파했다.
압권은 9·11 테러다.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을 드나들면서 조종 훈련을 했고 대형 여객기들을
미국 공항에서 납치하여 테러에 사용했다. 미국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런데 수천 명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로 미국은 자국 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실패를 철저히 분석했고 또 철저히 변했다.
이후, 단 한 차례도 조직 테러가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일본 등 군국주의 국가의 도전을 분쇄한 미국은 영국을 대신하여 패권 국가로 등장한다.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등장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달리, 미국은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들을
전쟁 없이 이겨왔다. 미국의 가장 강력한 힘은 세계 질서를 좌우하는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능력이다.
봉쇄와 경제전으로 소련을 붕괴시켰다. 독일과 일본의 제조업이 미국을 제치는 등 경제적 도전에 직면했을 때,
미국은 경제 중심을 제조업에서 금융과 파이낸싱으로 전환하여 이들의 도전을 물리친다.
이어, 정보기술(IT) 산업으로 경제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경쟁국들을 따돌렸다.
최근 미국은 셰일가스로 에너지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러시아·중동 산유국을 통제하고 패권을 공고히 한다.
미국은 중국의 도전을 물리칠 강력한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할 힘을 갖고 있다. 바로 인구 패러다임이다.
2050년경 중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인구가 14억에서 12억대로 준다.
그런데 미국은 3억에서 4억5000만으로 50% 증가하고 젊은 인구구조를 유지한다.
이것은 상당 부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똑똑한 인력이 유입된 결과이며, 그중 중국 인재가 상당수를 차지할 것이다.
21세기가 여전히 '미국의 것'인 까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한·미 동맹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한·미 동맹은 지난 67년간 우리의 안전과 번영에 기여했고 건강하고 긴밀한 한·중 관계를 뒷받침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자세로 중국을 대할 상황은 아니다.
대륙의 힘을 빌려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구한말 지배층의 구태가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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