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4.28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한스 볼롱기에르, 꽃이 있는 정물화, 1639년, 나무판에 유채,
67.6㎝×53.3㎝,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최근 네덜란드에서 튤립 수억 송이를 갈아엎었다.
만남과 축제가 사라진 지금, 튤립 또한 갈 곳이 없었던 탓이다.
튤립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의 대표 수출품이자 상징 같은 존재였다.
당시 무역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리던 하를럼에서 꽃 정물 화가로 활동하던
한스 볼롱기에르(Hans Bollongier·약 1600~1675년)는
만개한 그 시절의 튤립을 보여 준다.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풍성한 다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빨강에 흰 줄무늬가 뚜렷한 렘브란트 튤립.
그런데 바로 이 튤립이 역사상 최초의 투기 사건, '튤립 버블'의 주인공이다.
렘브란트 튤립의 줄무늬는 사실 병충해의 산물이다.
화가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레이던에서 발생해 이런 이름을 얻었지만 정작 렘브란트는 튤립을 그린 적이 없다.
원래도 아름다운 튤립에 열광하던 네덜란드인들은 그 선명한 색의 조화와 오묘한 무늬에 빠져들었다.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꽃은 물론이고 꽃이 피기 직전 단계인 구근(球根)을 대상으로 한 선물 거래가
호황을 이뤘다. 하지만 구근 거래는 복권이나 마찬가지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인지 아닌지는 피어야 알 수 있지만, 거래는 구근 단계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튤립 구근은 마침내 비정상적 투기 열풍을 일으켰고, 1630년대에 정점에 올라
구근 하나 값이 도시 근로자 평균 연봉의 열 배였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을 남겼다.
1637년 2월. 거품은 하루아침에 훅 꺼졌다. 흑사병이 돌기 시작하자 경매장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
전염병 여파로 죄 없는 튤립이 무수히 버려진 게 올해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품이 꺼진 다음에 그린 볼롱기에르의 아름다운 꽃 그림은 열흘 붉다 떨어지는 꽃처럼 허망한 세상사를 보여 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7/20200427046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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