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동양화가 말을 걸다]단풍나무 숲에서 불타는 세상을 본다-안중식 풍림정거

바람아님 2014. 2. 7. 19:33
안중식 ‘풍림정거’ 1913년. 164.4×70.4㎝. 비단에 색. 리움미술관
    온 산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설악산에서부터 점화된 불길은 계룡산을 전소시키고 내장산과 지리산을 거쳐 주왕산과 월출산에 머지않아 이르게 된다. 화마(火魔)는 땅끝마을 해남 미황사의 달마산 병풍바위 앞에 당도하고서야 비로소 뜨거운 포효를 멈출 것이다. 가을만 되면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불길은 잿빛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 탈 대로 다 타고 낙화한다. 낙엽은 눈비 속에서 분해된다. 낙엽은 찬란했던 단풍의 추억을 가차 없이 뒤로 한 채 바스라지고 눅진해져 거름으로 돌아간다. 형체가 변했다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낙엽의 화신인 거름은 땅을 살리고 미생물을 키우면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봄에 다시 제 몸속으로 들어가 연둣빛 잎사귀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꽃봉오리로 혈혈하게 피어난다. 생명의 부활을 위한 자연의 순환은 죽음조차도 아름답다.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단풍 즐기다
   
   서리가 내렸다. 찬 공기 속에서 산맥이 느닷없이 변신한다. 교복 입은 학생들처럼 비슷비슷하던 나무들이 제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분장을 하고 나타난다. 가을 산의 메인 컬러는 붉은색과 주황색이다. 노란색과 갈색은 베이직으로 깔린다. 메인 컬러와 베이직이 능선에 서서 달아오르면 사람들은 색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산에 오른다. ‘이월의 꽃보다 더 붉은 단풍’ 앞에서 사람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상기된다.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풍림정거(楓林停車)’는 온 산에 서리가 내려 은색으로 변할 즈음 산에 오른 선비가 수레를 멈추고 앉아 단풍을 구경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안중식은 메인 컬러인 붉은색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베이직을 은색으로 깔았다. 은색은 단풍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서리 내린 가을 산의 냉기를 전해준다. 눈을 통해 추위를 느낄 수 있으니 좋은 색이다. 공자님 말씀처럼 문(文)보다 질(質)이 우선이니 주제가 되는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꾸밈이 가상하다. 심하게 각지고 겹겹이 물러나는 뒷산의 주름은 안중식 특유의 산수 표현법으로 이곳이 깊은 산속임을 암시한다.
   
   제목으로 쓰인 ‘풍림정거(楓林停車)’는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 ‘산행(山行)’에서 따온 구절이다.
   
   ‘멀리 늦가을 산에 오르니 돌길 비껴있고(遠上寒山石徑斜)
    흰 구름 이는 곳에 몇 채의 인가(白雲生處有人家)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단풍을 구경하나니(停車坐愛楓林晩)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의 꽃보다 더 붉네(霜葉紅於二月花)’
   
   
   가을 단풍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시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노래한 왕유(王維·699~759)의 절창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안중식의 ‘풍림정거’가 두목의 시를 형상화한 작품임에도 시와 그림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두목의 시에서는 수레를 멈추는(停車) 행위가 먼저이고, 단풍(楓林)을 구경하는 것이 다음이다.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작정하고 나선 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반면 안중식의 그림 제목에서는 단풍(楓林)이 멈추는(停車) 행위보다 앞에 놓였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산에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연히 단풍나무숲을 지나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니 그 모습이 황홀하여 잠시 멈춘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은 단풍을 보며 오랜 사유 속에서 단풍의 빼어남을 묘사할 단어를 찾았다. 그 대상이 ‘이월의 꽃’이었다. 화가는 보는 즉시 이끌리듯 붓을 들어 ‘이월의 꽃보다 더 붉은’ 단풍을 그렸다. 시 속에서는 시인의 의지가, 그림에서는 자연에 대한 감탄이 먼저다. 자연이 화가의 마음에 불을 질러 어쩔 수 없이 붓을 들게 했다. 그저 화가는 자연이 시키는 대로 붓을 들어야 한다. 감동으로 무장한 자연의 충동질 앞에서 감히 무너지지 않고 대항할 자 그 누구인가.
   
   ‘풍림정거’는 ‘도원문진(桃源問津)’과 쌍을 이뤄 제작된 작품이다. ‘풍림정거’가 당대의 시인 두목의 시를 그렸다면, ‘도원문진’은 두목보다 한참 전의 선배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살펴보았듯 무릉에 사는 어부가 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복숭아꽃을 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도화원기’는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화가들에게 붓을 들게 하는 화제(畵題)였다. 안중식은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도 ‘도원도(桃源圖)’를 가장 많이 그린 작가다. 그런 그가 가을을 그리면서 곁에 봄을 그렸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마치 우리 인생을 압축해 놓은 것 같다. 봄에 무릉도원으로 들어간 어부가 세상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도원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가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짧은 시간, 꽃이 피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낙엽이 지는 그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조바심치고,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찬바람이 부는 짧은 생을 살면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무릉도원에서 단풍나무숲까지
▲  안중식 ‘도원문진’ 1913년. 164.4×70.4㎝. 비단에 색. 리움미술관
정답을 안다면 인생은 조금 쉬워질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어렵고 그래서 더욱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 인생이다. 어느 누구의 삶도 아닌 오직 나만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무릉도원에서 단풍나무숲까지 걷는 동안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문학을 기웃거리며 그림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내 삶의 모델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중의 한 사람. 도원을 함께 걷다 엊그제 먼저 단풍나무숲으로 건너간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문을 나서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타인의 의견의 소음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뒤덮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심장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안중식이 봄, 가을을 그리면서 말하고 싶었던 뜻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다.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거름을 만드는 불길인지 아니면 생명을 태우는 불길인지 낙엽을 밟으며 뒤돌아본다. 이번 주말에는 배낭 메고 뒷산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