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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1958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대화

바람아님 2015. 11. 2. 10:50

(출처-조선일보 2015.11.02 안용현 베이징 특파원)


안용현 베이징 특파원 사진1958년 12월 6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난 김일성은 기분이 좋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북한에 남아있던 중공군 28만명이 그해 10월 완전히 철수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잔류한 중공군이 언제든 자신의 권력을 뒤엎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중공군 철수로 시름을 놓은 김일성은 마오에게 군대 문제를 꺼냈다. 
중국 외교부의 '마오쩌둥 외빈 접견 담화집'에 따르면, 김일성은 "현재 우리는 약 30만의 상비군이 있다. 
현재 정황상 (군대를) 줄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마오는 "줄이면 안 된다. 줄이면 안 된다"고 답했다. 
1957년까지 "중공군 28만명이 있으니 조선(북한)은 군대를 감축하라"고 요구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김일성이 "우리는 무기를 생산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말하자, 마오는 "문제없다.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지면 중국은 아무런 대가 없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오는 "중·소는 북한의 무기 공장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이듬해인 1959년 10월 1일 김일성은 중공의 국경절(건국기념일) 열병식에 참석해 마오와 함께 톈안먼(天安門)에 올라 
'북·중 혈맹'을 과시했다.

지난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을 맞아 김일성과 마오가 섰던 자리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중국과 같이 협력해 
나가기로 그렇게 이야기가 된 것"이라며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건가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일성 시대 북·중 관계를 한·중 관계가 대신하기 시작했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그러나 북·중 관계는 우리 생각보다 복잡하다. 
지난 10월 초 중국 서열 5위인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의 방북(訪北)을 계기로 중국의 대북 정책에서 '비핵화'가 다시 
뒤로 밀리는 분위기다. 
류윈산은 김정은을 만나 '한반도 평화·안정'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비핵화'와 '대화·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비핵화→한반도 안정→대화·협상' 순이던 중국의 한반도 3원칙이 
'한반도 안정→비핵화→대화·협상' 순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의미다. 
박 대통령과 리커창 총리의 지난 31일 정상회담에서도 리 총리는 '비핵화'를 '한반도 안정' 뒤에 언급했다.

1958년 마오는 김일성에게 "북한 군대도 중국을 많이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38도선을, 월남(북베트남)은 17도선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이 국제적 의무"라고 밝혔다. 
당시 베트남도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었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 이후 미군이 38도선을 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베트남과는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싸우고 있지만, 베트남을 버리지는 않는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미·중이 충돌하는 가운데 시 주석이 5일 베트남을 국빈 방문하는 것도 
베트남이 미국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제 시 주석이 정상을 만나지 않은 국가는 북한 정도다. 
1958년이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크게 바뀐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