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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처럼 눈부시네 … '천년의 빛' 나전칠기

바람아님 2015. 3. 16. 09:28

[중앙일보] 입력 2015.03.16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조선 나전'전
대범하고 익살스런 치기 번득
바다거북 등껍질, 상어가죽도 써
이름없는 조선 공예가 안목 대단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다. 인기척이 없는데도 두런거린다. 서울 도산대로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전시실은 봄꽃보다 먼저 도착한 나전칠기(螺鈿漆器)의 화사함으로 영롱하다. 꽃단장하고 재잘대며 모여 앉은 봄 처녀들 같다. 수다스럽고 호사스런 그 장식에 깃든 멋이 춘정(春情)을 돋운다. 조선시대 나전칠기를 중심으로 한 목물(木物)로 꾸민 ‘조선의 나전-오색찬란’은 진하고 야한 한국미의 일면을 보여주는 기획특별전이다. 흔히 조촐하고 검박하며 담담한 미감을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조선의 공예에서 가장 이채로운 발달을 보인 나전의 화려한 외출인 셈이다.

나전칠기는 고려시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에 그 우수함을 떨친 한국의 대표 공예품이었다. 왕공귀족(王公貴族)의 호사나 불교의 권위를 돋우기 위해 주로 제작되던 나전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신선한 감각을 받아들여 크게 변한다. 대범하면서도 거친 표현의 회화적 무늬와 함께 익살스런 치기가 번득이게 된다. 조선 초기인 15~16세기에는 연당초문(蓮唐草文), 쌍봉문(雙鳳文), 쌍용문(雙龍文) 등 고려시대 도안이 성글어지며 대형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기에 접어든 17~18세기에는 점차 매죽(梅竹)과 화조(花鳥) 등 당시 청화백자의 문양과 같은 그림이 다수를 이룬다. 말기로 가는 19세기에는 자유분방한 자연을 그리는 흐름이 짙어지며 십장생(十長生)과 산수풍경이 성행했다.

 ‘오색찬란’ 전은 이러한 조선 나전칠기의 변천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게 꾸몄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사들인 호림박물관 소장품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 등에서 빌려온 명품이 그들먹하다. ‘목(木) 나전을 입히다’와 ‘목(木) 색을 더하다’로 전시장을 나눠 조선시대 목공예품이 얼마나 다양하게 진화해왔는지 조목조목 뜯어봤다. 상자나 합, 갑 등 사면에 두루 장식이 되어있는 목물을 사방에서 볼 수 있게 전시장은 높낮이를 배려하고 널찍널찍하게 꾸몄다. 한 점 한 점 두루 뜯어보며 한 바퀴씩 돌다 보면 옛 사람들이 ‘천년의 빛’이라 칭송했던 ‘나전의 영광’이 살아 돌아오는 듯 눈이 부시다.

 나전 장식의 보조로 활용되었던 대모(玳瑁)와 어피(魚皮) 작품도 색다르다. 대모는 바다거북 등껍질, 어피는 상어 가죽을 사용해 칠기 위를 수놓는 것이다. 조선후기 목공예의 한 변종이라 할 수 있는 화각(華角)은 소뿔을 얇게 켜 채색한 유물로 그 밝고 고운 색채가 남다른 미감을 뽐낸다.

 유리 진열장 안에서 반짝이는 나전칠기를 보고 있으면 이 곱고 화사한 목물을 보듬고 살았을 조선시대 아녀자들이 떠오른다. 혼수용 옷상자, 머리 매무새용 빗접, 고운 꿈을 가져올 베갯모, 각종 바느질 도구를 담을 반짇고리 등을 멀리 바닷가 통영(統營) 고을 무명 칠공에게 주문하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기다렸을 규수의 자태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치레를 이렇게 멋지게 하고 살았다면 그들의 문화 감각은 상당했을 것이다. 때로 장식이 과하다 싶으면서도 그 객기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이름 없는 조선 공예가들의 안목이 새삼 느껍다. 6월 30일까지. 02-541-3525.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나전칠기=전통 목공예품의 대표적 꾸밈 기법 중 하나. 검은 색 옻칠을 한 나무 표면에 새긴 무늬를 따라 전복이나 소라의 자개 패를 오려내 붙이거나 박아 넣었다. 고려 나전칠기 솜씨는 세계적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났으나 습기에 약하고 재해에 취약한 나전의 특성 탓에 보존이 까다로워 전해오는 작품 수가 적다. 이를 계승한 조선 나전은 꽤 많은 수가 남았다.

사진 설명

사진 1
익살스런 호랑이 모습이 자연 문양과 어우러진 ‘나전호작문 베갯모’, 19세기.

사진 2 고려 나전의 여러 요소를 되살린 ‘나전대모모란당초문 옷상자’, 17~18세기.

사진 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머리 매무새를 다듬는 용도의 빗접을 사군자와 새 문양으로 장식한 ‘나전화조문 빗접’, 19세기.

사진 4 매화와 대나무, 새를 박아넣은 ‘나전매죽조문 상자’, 18세기. [사진 호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