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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가을이 오면

바람아님 2015. 9. 24. 01:25

조선일보 : 2015.09.23 

바람에 실린 '결실의 계절' 서재에 쌓이는 청첩장에서 자식 농사의 결실을 본다
힘들어도 보람찬 우리 인생… 한가위 넉넉한 인심으로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자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 걸으면 20분 정도 걸린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는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두고 자주 걷는다. 엊그제는 집을 나서는데 가슴이 탁 트이는 게 코 밑으로 스쳐가는 바람에 실린 가을 냄새가 짙었다. 더위에 쫓기듯 여름휴가 떠나겠다고 미련 없이 짐을 싸들고 다녀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젖혔더니 부쩍 높아진 청명한 하늘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걷다 말고 잠시 가을 풍경으로 들어가 자연의 섭리(攝理)를 만끽했다.

가을이 오면 감나무가 생각난다.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그 감나무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어린 감나무를 가져다가 우리 집 뒤편 화단에 심은 것이었다. 내 방 창문을 열면 무성한 감나무 잎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감나무 덕분에 감이 익어가면 결실(結實)의 계절인 가을이 깊어짐을 알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감나무와 함께 가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엔 서재에 쌓여가는 청첩장을 보며 가을이 깊어짐을 느낀다. 내가 받는 청첩장의 대부분은 단순한 초대가 아닌 주례를 부탁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가정이 탄생하는 자리에 섰지만 특별히 가을이라는 계절에 '인생의 결실'을 맺는 결혼 예식은 언제나 '흐무뭇하다'. 아직 큰아들 녀석을 장가보낼 때가 오지도 않았는데 내가 혼주(婚主)가 된 것처럼 그렇다. 가을에 거두는 결실 중에 가장 뜻깊은 일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나에게 주례를 요청하려고 찾아오는 커플들에게 결혼 예식 전날까지 꼭 준비하도록 시키는 게 한 가지 있다. 각자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정성 들여 써오는 것이다. 결혼 준비로 바쁘겠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편지를 준비해오기를 당부한다. 그렇게 준비한 편지를 결혼 예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 앞에서 부모님께 직접 읽어드리도록 한다. 대개 혼주석에 앉은 부모님들은 아버지고 어머니고 자식의 편지를 들으며 눈물을 훔친다. 얼마 전 주례한 커플은 신랑이 너무 울어서 재미가 있기도 했지만 이내 하객들도 같이 눈시울을 붉히는 순서였다.

[ESSAY] 가을이 오면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이런 순서를 특별히 마련한 것은 입때껏 '자식 농사' 짓느라 고생한 부모님들을 '결실의 기쁨'으로 위로하기 위함이다. 나도 자식 농사를 짓고 있지만 농사 중에 제일 어려운 농사가 자식 농사 아니겠는가? 그러니 결혼 예식에서 진하게 축하받아야 할 사람은 신랑과 신부가 아니라 그들의 부모이다. 그저 보기만 해도 배부른 장성한 자식들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까지 들인 말 못 할 수고가 있으니 말이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을 수확하는 그날만 바라보며 인생의 모든 풍파를 이겨낸 부모들은 누구나 위대한 농사꾼이다.

오늘이 절기상 추분(秋分)이다. 자식 농사 지은 부모들에게 자식들 결혼시키는 날이 가장 기쁘다면 농부들에게는 이때가 제일 반갑다. 요즘에는 추수(秋收) 시기가 다르지만 과거에는 추분을 농사력으로 따져서 이때를 즈음하여 추수를 했다. 그래서 추분은 가을걷이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바야흐로 가을은 따고, 꺾고, 베고, 말리고, 마당질까지 고단한 즐거움이 있는 추수의 때인 것이다.

그 가을걷이를 위하여, 그 탐스러운 곡식과 열매를 얻기 위해 들인 농부의 부지런함과 정성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직접 농사꾼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사과 농사 짓는 지인(知人)과 통화 한번 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만큼 만날 사과밭에 나가 있다는 소리다. 올해는 사과가 맛도 좋고 풍년이라며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런 남모를 수고와 노력이 있었기에 농부는 이 계절에 풍성한 가을걷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품에 넘치도록 익은 곡식과 열매를 안은 농부의 얼굴은 안 봐도 안다. 깊게 팬 주름은 팽팽하게 펴지고, 검게 그을린 얼굴은 한가위의 보름달처럼 환해질 것이다.

이렇듯 우리 인생에도 가을이 오면 하게 되는 다양하고 풍성한 가을걷이를 할 날이 반드시 온다. 때론 인생 농사를 짓느라 눈물을 흘리며 포기해야 했던 달콤한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눈팔지 않고 굳건하게 삶을 일궈온 수고의 대가(代價)로 알차게 익은 곡식과 열매가 품에 넘치기를 기대해도 좋다. 쉼없이 달려가 맞이할 그날의 나를 상상하면 비록 지금은 앞이 깜깜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저마다 삶의 모습과 시기는 달라도 살아있는 한은 아직도 거둬들일 인생의 결실들이 남아있다.

모두가 넉넉하고 따뜻해지는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추석에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인생 농사로 지친 서로의 노고(勞苦)를 격려하며 한가위의 인심(人心) 같은 위로를 건네보면 어떨까? 탐스러운 햇과일과 건강한 기운이 넘치는 햇곡식처럼 아직은 아니지만 소리 없이 영그는 인생의 결실들을 모두가 기대해보길 바란다.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