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10.23 김태익 논설위원)
1991년 6월 천경자 화백으로부터 엽서를 받았다.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저의 불행한 사건이 가끔 식도(食道) 부분에 둔통(鈍痛)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해 봄 '미인도'를 둘러싼 가짜 그림 논란을 겪고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작가가 "내 작품 아니다" 하는데도 미술계에서 "당신 작품 맞다"고 몰아붙이는 데에 그는 무거운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상처는 미국 가서도 여전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건강에 이상 없는 한 차원이 다른 작품을 위해 남은 생명을 불태울 각오"라고 했다.
그러나 다시는 그의 신작을 보지 못했다.
▶위작(僞作) 논란 와중에 천 화백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 같았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화실을 겸한 아파트 거실은 어두컴컴했다.
테이블엔 마시다 만 와인 잔과 담배꽁초 그득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미완성 그림들이 작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대 있었다.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작품은 내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 왔다' 하고 말을 건네곤 합니다.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겠어요?"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천 화백 삶은 파란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아끼는 가족을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기쁨과 상처를 받았다.
채색(彩色) 그림은 한때 화단에서 따돌림당했다. 이 모든 한(恨)을 그는 화사하면서도 슬픈 그림에 녹였다.
"그림을 그릴 때 광기(狂氣)가 없으면 재미없어요. 하지만 이 광기를 잘 다스려 그림으로 승화시키기도 힘들어요."
그는 나혜석 이래 한국 여성 화가의 흐름에서 가장 우뚝한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
▶자기 작품이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그는 작품을 남발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화랑 주인에게 작품을 한 점 줬다가도 이튿날 "돈 돌려줄 테니 다시 달라" 전화하기도 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나올 만큼 멋쟁이였지만 어딜 갈 때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교수나 예술원 회원 같은 자리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천 화백은 1998년 분신과도 같은 작품 93점을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마지막 순간 작품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공공(公共)을 위해 희사했다.
천 화백이 8월 초 미국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 딸이 유골을 갖고 들어와 시립미술관을 한 바퀴 돈 것으로 장례 절차는 끝났다.
천 화백처럼 오로지 예술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자존심을 세운 화가도 드물다. 또 하나 전설이 갔다.
그의 인생 92페이지 중 마지막 24페이지가 좀 더 행복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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