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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종횡무진 인문학] 싸움 대신 교류 택한 18세기 韓·中·日

바람아님 2015. 12. 12. 09:22

(출처-조선일보 2015.12.12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정민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흔히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런 기백(?)은 유구한 전통인 모양이다. 
18세기 조선 지배층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청(淸) 제국을 오랑캐 나라라고 얕보았다. 
오늘날 한국의 국시(國是)가 남북통일이라면, 당시 조선의 국시는 북벌(北伐)이었다.

북벌이라는 이념이 사회를 억누르던 18세기 후반에 '중국에 환장한' 이단아들이 나타났다. 
훗날 북학파라 불리게 되는 박제가·유득공·이덕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청나라를 오랑캐 국가로 치부했던 조선을 오히려 고루하다고 여기고, 
동시대의 청나라 학자들과 지적(知的) 파이프라인을 만들었다.

세계 제국이었던 몽골과 고려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이래 수백 년 만에 한반도 사람들이 
동시대의 세계와 발걸음을 나란히 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정민 '18세기 한중 지식인의…'나아가 이들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적 관념에서도 벗어났다. 
당시 일본 학계는 청나라가 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을 조선보다 먼저 수입했으며, 
'사고전서'에도 자국인(自國人)의 책을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북학파는 그런 일본 학계를 동등한 토론 상대로 인정했다. 
이리하여 18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문예공화국'이 탄생했다.

한·중·일과 타이완·북한이 도토리 키 재기처럼 으르렁대고 있는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밀한 지적 네트워크의 존재를 최초로 밝혀낸 것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1879~1948)라는 
일본 연구자였다. 
20세기 초반에 청나라의 학술을 연구했던 후지쓰카는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라는 
기념비적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당시 세계 학계에서 그의 연구는 주목받지 못했고, 그가 수집한 귀중한 문헌은 전쟁 통에 흩어졌다. 
그 일부가 1950년대에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후지쓰카 컬렉션은 오랫동안 잊힌 채 남았다. 
그리고 2012년 옌칭연구소를 방문한 정민 선생에게 후지쓰카 컬렉션이 말을 걸었다. 
자신들을 망각 속에서 꺼내달라고.

이 책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연구자에게 말을 건넸고, 
연구자는 어둠 속에 존재하던 귀중한 자료들을 고구마 캐듯 줄줄이 발굴해냈다. 
정민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 은 그 기이한 현상을 입증하는 생생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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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韓中지식인 교류, 日학자 자료 통해 추적하다

(출처-조선일보 2014.05.24 이한수 기자)

美 옌칭도서관의 후지쓰카 옛 소장본으로 18세기 동북아 지식 교류의 모습 복원
19세기로 이어지며 '문예공화국' 형성

정민 한양대 교수는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그는 동양 고서의 보고(寶庫)인 옌칭도서관에서 한 일본인 학자의 이름을 만난다. 후지쓰카 지카시(藤塚�·1879~1948).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교수로 추사 김정희 연구자. 소장하던 추사의 '세한도'를 아무런 대가 없이 한국에 돌려준 인물이다. 

1940년 경성제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일본에 돌아갈 때 그가 수집한 장서와 자료는 기차 화물칸 몇량을 가득 채울 

정도로 방대했다. 후지쓰카는 한·중 지식인 교류와 관련 있는 자료는 무엇이든 긁어모았다.

정민 교수는 어느 날 옌칭도서관에서 우연히 후지쓰카가 소장했던 옛 자료를 발견했다. 책은 다시 책을 불렀다.

한·중 지식인 관련 책을 찾다 보면 여지없이 후지쓰카 소장본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경제적 곤란에 처한 아들이 내놓은 

아버지 소장서 중 상당수가 들어온 것이었다. 후지쓰카는 책 속에 숱한 메모를 남겨놓았다. 

정민은 고백한다. "이 자료들을 되풀이해 들춰보다가 내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후지쓰카는) 구체적인 관련 정보를 더 얻으려면 다시 어느 책을 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메모를 따라가면서 그와 나 사이에 묘한 접속이 이루어지는 듯한 비밀스러운 느낌을 종종 갖곤 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정민 지음|문학동네|

720쪽|3만8000원

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박제가는 뛰어난 학문과 글씨 솜씨로 중국 지식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

 /문학동네 제공


정민은 후지쓰카 소장본과 관련 자료를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 교류의 모습을 꼼꼼히 복원한다. 

홍대용(1731~1783)은 한·중 지식인 교류의 첫 장을 연 조선 지식인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한족 지식인 엄성·육비·반정균 등과 만나 사귀며 관련 기록을 남겼다. 

이어 유금·이덕무·박제가·유득공·박지원 등이 사행길에 나서면서 활발한 지식인 교류가 일어났다.

박제가는 뛰어난 시와 글씨로 북경 문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북경 서점가인 유리창 거리에는 박제가의 가짜 글씨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박제가의 아들이 편찬한 후지쓰카 소장본 '호저집'에 따르면 박제가는 기윤·옹방강·완원·나빙 등 당대 중국 최고 지식인 

110명과 교유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는 19세기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며 당당한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을 형성한다.

'문예공화국'은 18세기 유럽에서 쓰던 말이다. 공통 문어인 라틴어를 통해 유럽 인문학자들이 소통하던 지식 커뮤니티를 

말한다. 이 상상의 공화국은 같은 시기 동양에서도 공통 문어인 한문을 통해 이뤄졌다. 청을 무찔러야 할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의 '북벌(北伐)'이란 국시(國是)는 지식인 교류를 통해 '북학(北學)'으로 바뀌게 된다. 총과 칼이 아니라 말과 글로 

소통하는 세계는 동시대인의 지적인 교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18세기 한·중 지식인 교류의 모습이 20세기 초 일본 학자의 자료 수집으로 한데 모이고, 

21세기 한국 학자가 미국 도서관에서 이를 발견해 복원에 이르는 한·중·미·일의 인연은 한편의 대하드라마 같다. 

정민 교수가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후지쓰카 컬렉션'에 대해 하버드대에서 발표한 후,

중국인 담당 사서는 "다쉐저라이러(大學者來了·대학자가 왔다)"라고 했다 한다. 

관련 자료의 표절 및 진위까지 섬세하게 고증하는 대목에 이르면 저자의 학문이 어느 경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