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백선엽·김종필

[백선엽의 6·25 징비록④]"북한에 쏘랬더니 왜 서울서 총질이야!"

바람아님 2016. 1. 13. 00:32
조선일보 : 2013.11.20 15:50

미군 장성들, 12·12 군사행동 격렬히 비난

(1)군은 어떤 존재인가

흥분한 미8군 사령관의 욕설

존 위컴 미 8군 사령관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는 다 옮길 수 없지만, 꽤 강한 욕설을 섞어서 군인으로 정치적 행동에 나선 한국군 고위 장성 두 사람을 비판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분이 참 묘하다. 위컴은 30년 전에 벌어진 6·25전쟁에서 이 땅에 올라와 전선을 지휘한 미군 장성들의 새카만 후배다. 우리식으로 조손(祖孫)의 관계를 따져 물으면, 위컴 사령관은 맥아더의 손자, 밴 플리트 장군과 테일러 장군한테는 아들 쯤에 해당하는 군 후배였다.

30년 전 벌어진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 밴 플리트와 맥스웰 테일러 장군 등은 현대적인 군대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대한민국 군대의 고위 장교들에게 “군은 절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밴 플리트와 테일러의 새카만 후배가 30년 뒤의 상황에서도 한국 군대의 정치개입을 성토하는 장면이었다.
전두환대통령은 1984년 3월 28일 팀스피리트84 훈련에 참가한 이기백 합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등 한국측 71명과 위컴 美육참총장, 세네월드 한미연합군사령관등 미국측 인사 90명에게 만찬을 열었다.
전두환대통령은 1984년 3월 28일 팀스피리트84 훈련에 참가한 이기백 합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등 한국측 71명과 위컴 美육참총장, 세네월드 한미연합군사령관등 미국측 인사 90명에게 만찬을 열었다.
그는 특히 사태를 주도한 사람보다, 그를 도와 병력을 전선으로부터 빼낸 장군을 겨냥했다. “주도한 사람은 주도한 사람이라고 칩시다. 전선의 사단을 담당했던 장군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한국군의 이 전선 사단은 유엔군의 전투 서열에 들어있는 군대입니다. 그런 군대가 어떻게 쿠데타 대열에 상부의 명령 없이 나설 수 있는 겁니까?”

그가 지목한 사단은 서울의 북방인 일산 일대에 주둔하는 군대다. 북한의 도발이 있을 경우 전선의 1사단과 25사단을 대체해 개성으로 진공(進攻)해야 하는, 작전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중요성이 아주 큰 부대였다. 그런 부대가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의 양해 없이 쿠데타에 나섰다는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의 흥분은 좀체 가라앉을 줄 몰랐다. 위컴은 이어 “군대가 쿠데타에 나서는 일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미군은 쿠데타를 벌이라고 해도 절대 나서지 못 합니다. 미군은 법이 규정한 엄정한 틀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설 뿐입니다.”

그의 말이 틀릴 수 없다. 그것이 군대다. 엄정한 법의 틀을 넘어선다는 일을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 위컴이 허세를 부려 꺼내는 내용도 아니다. 그들은 군대라는 존재를 안다. 함부로 법과 규정의 틀을 넘어서면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폭력이 무엇을 부르는지 말이다.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미 70의 고령에 들어섰지만, 전쟁의 모질고 험한 풍상을 고스란히 겪은 나로서는 그 점을 모를 수 없었다. 내가 무안을 넘어, 창피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그 말은 거짓이다. 대한민국 군대 창군의 멤버로 미군의 도움을 힘겹게 얻어가며 북한의 위협을 돌려 세우기 위해 고심했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북한에 쏘랬더니, 왜 서울서 총질이야!”

또 그 무렵이었다. 12·12가 벌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만난 장성이 존 베시 대장이었다. 그는 존 위컴에 앞서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 미 8군 사령관을 역임한 뒤 미국으로 귀국해 육군참모차장을 맡고 있었다.
1979년 7월 이임하는 존 베시 유엔군사령관을 맞는 박정희 대통령.
1979년 7월 이임하는 존 베시 유엔군사령관을 맞는 박정희 대통령.
그는 1978년 지미 카터 행정부가 미군의 철수를 추진할 때 미 의회에 출석해 “북한군의 침략에는 미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경력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하려 했던 지미 카터 행정부와 반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는 미국의 지휘관으로서 북한 김일성 군대의 도발 가능성에 주목했고, 따라서 한국 군대의 역량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장성이었다.

그런 그는 12·12를 어떻게 지켜봤을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존 위컴 당시 미 8군 사령관 못지않게 한국 군대의 정치개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함께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의 거친 흥분에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도대체, 당신 나라의 군대는 어떻게 굴러가는 곳이냐. 국민들이 돈을 모아서 준 돈으로 무기를 사서 위협적 도발을 일삼는 북한을 향해 쏘라고 했는데, 당신 나라 군대는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을 하느냐. 이게 말이 되느냐. 이런 군대는 정신이 나간 군대다.”

힐난이었다. 마음 구석구석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파편처럼 날아와 박혔다. 군은 그렇게 정치와 거리를 떨어뜨린 채 서 있어야 한다. 그 군대가 지닌 제어할 수 없는 힘이 틀 밖으로 마구 번진다면 그것은 자칫 내란(內亂)을 불러 혼란(混亂)으로 치닫는다. 자칫 자멸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다.

존 위컴과 존 베시. 둘은 한국의 안보 상황을 일선의 지휘를 통해 체험한 인물들이다. 당시 한국의 안보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 그가 내뿜는 왕조 식의 방자한 권력 욕심과 대한민국 적화(赤化) 야욕은 그칠 줄 몰랐다. 그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했던 우리 군대가 지닌 ‘성역(聖域)’으로서의 의미를 그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불과 30년 전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을 겪은 나로서는 말이다.

군의 정치개입은 5.16만으로 충분했다

내 짧은 소견으로 보자면, 대한민국 군대의 역사에서 군인의 정치적 개입은 5·16 한 번으로 충분했다. 4·19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무너진 뒤 우리에게 닥쳤던 것은 매우 심각한 혼란이었다. 정부는 무능했고, 자유당 말기에 발호했던 인사들도 주눅 들지 않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부패와 무능의 정권을 몰아낸 대학생들의 순수한 뜻은 4·19 직전까지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불과 10년 전에 한반도를 동족상잔의 참극으로 몰아넣었던 북한 김일성 정권을 낭만적 시각으로 보는 우를 범하면서 도를 넘어서고 말았다. 모든 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1961년 6월 29일 이임 퇴역하는 전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장군이 한국을 떠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박정희 부의장을 만났다.
1961년 6월 29일 이임 퇴역하는 전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장군이 한국을 떠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박정희 부의장을 만났다.
박정희 소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혼란스러웠던 정치는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았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에 앞서 ‘거사’를 꿈 꿨던 군인들이 있었다. 겉으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4·19에 뛰어든 대학생과 시민들의 분위기에 편승하면서 노골적으로 권력을 바라보던 정치적 군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동태에도 관찰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은 카터 매그루더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극도의 혼란기에 빠지던 4·19에 이어, 군정이 들어서던 5·16까지 격동의 세월을 지켜보던 미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는 ‘야전’이라는 항목이 빠져 있었다. 거친 전쟁터를 사납게 오간 야전의 맹장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는 보급전문가였다.

나는 4·19 와중에 그를 남산의 내 사무실로 오게 해 의견을 전달한 적이 있다. 사무실에 찾아온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정치에 노골적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군의 움직임이 분명히 있다. 이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단단히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가 나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이력 탓인지는 몰라도, 위기시 재빨리 상대를 제압하는 단호함은 그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군은 4·19 이전과 이후에도 역시 정치적 행보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통제할 어떤 권력의 중추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권력 자체를 손에 거머쥘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와중에서는 누구라도 군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만큼씩은 예견할 수 있었다. 혼란의 상황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힘이 가장 비밀스럽게 뭉쳐져 있는 곳, 즉 군대에 시선을 돌리게 마련이다. 군은 그런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결국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일부 그룹이 거사에 나섰던 것이다.
1995년 10월, 12·12 및 5·18사건 관련 첫 공판에 출정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서 타고온 호송차량에서 내려 서울지법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김진평 기자
1995년 10월, 12·12 및 5·18사건 관련 첫 공판에 출정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서 타고온 호송차량에서 내려 서울지법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김진평 기자
그에 비해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생겨난 공백이 군의 개입을 부를 만큼 혼란스러웠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 젓는다. 박 대통령의 산업화 추진으로 경제적으로는 이미 토대를 닦은 대한민국이었고, 그의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 속에 관료의 힘도 크게 성장한 대한민국이었다. 정치권 또한 유신시절의 시련기를 거치면서도 4·19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량을 키운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하나회 출신 장성들이 정치 일선에 나섰다. 12·12에 이어 이듬해 5·18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5공화국이 출범하고 말았다. 한국 정치사의 역정을 여기서 다 회고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출범하고 난 뒤 나름대로 결실을 맺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대, 국가의 간성으로 작용해야 할 대한민국 군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