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진짜 무서운 것은 혁신을 국가운영의 시스템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양회(兩會, 전인대·정협회의)는 국가 중대 업무를 토론하고, 법을 만들고, 예산을 결정하는 최대의 정치행사다. 그런데 지난달 열린 2016년 양회에선 참석한 기업총수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 최대의 포털인 바이두 설립자이자 회장인 리옌훙은 무인자동차 관련 법규를 조속히 완비할 것을 촉구했다. 지난해 양회에서는 정부가 인공지능 기술 발전을 위한 두뇌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이쥔 샤오미 창업자 겸 회장은 ‘대중창업 만인혁신’을 위한 제도적 환경을 갖추자고 주장했다. 텐센트 창업자 마화텅 회장은 공유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 최대의 차량공유업체 ‘디디콰이디’도 운영하고 있다. 재벌 총수가 국회에 나와 자기 사업과 관련된 정책을 주문한 셈이다. 한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중국 정치에선 벌어진다.
2015년 양회에는 100대 부자 중 36명이 참석했다. 15명이 전인대 대표, 21명이 정협회의 위원이었다. 과연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국가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012년 12월 ‘중국 갑부들, 공산당을 휩쓸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무산계급을 상징하던 공산당은 옛말이 되고 억만장자 공산당 당직자가 속출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천지개벽의 시발점은 장쩌민이 2000년 3월에 발표한 ‘3개 대표론’이다. 공산당이 노동자·농민뿐 아니라 자본가와 지식인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이론이었다. 자본가를 당에 받아들여 생산력을 높여야 전 인민이 잘살고 안정된 소강사회가 가능하다는 국가 운영 철학이 반영됐다. 진보파가 “부자·귀족·권력층을 위한 정당으로 변질됐다”고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혁신을 수용하는 국가운영 시스템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고, 마침내 우리가 알았던 만만한 중국은 사라지고 없다.
1840년 아편전쟁을 겪고 나서 1976년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의 극좌 광기에서 벗어나기까지 중국은 종이호랑이 신세였다. 중국이 깊이 잠든 사이에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안보지원을 받고, 일본의 첨단기술을 이전받아 고속질주했다. 1992년 한·중 수교는 잘나가는 한국을 덩샤오핑의 중국이 파트너로 선택한 결과였다. 하지만 맹수가 잠에서 깨어나 포효하면서 두 나라의 상황은 역전되고 있다.
지금의 한국에서 정부와 관료의 혁신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창업 1, 2세가 퇴장한 민간 기업에서도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주문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 보이지 않는다. 한 재벌 총수는 “우리 회사 임직원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사장과 임원도 속으로는 자기가 있을 때까지만 회사가 망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아니나 다를까, 펠프스 교수에게 한국의 혁신역량을 평가해 달라고 하자 “소수의 기업에 집중돼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아편전쟁 이후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던 중국 민중과 지식인을 신랄하게 풍자한 루쉰의 소설 『아Q 정전』의 스토리가 떠오른다. 아Q는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노예근성을 가진 기회주의적 인간의 전형이다. 어떤 패배와 모욕도 자기합리화를 통해 승리로 환원시키는 ‘정신적 승리법’은 그만의 심리적 방어기제다. 상대에게 맞으면 “자식이 아비를 치다니…”라고 자위하면서 우위에 서는 식이다. 부서지는 파도를 가득 채운 하이난도의 남중국해 수평선 너머로 중국의 고질이었던 아Q의 잔재, 대국의 자존심에 도취한 시대착오가 소멸되고 있음을 보았다.
총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전환의 시대에 나를 대표하고, 나의 이익을 지켜줄 정치세력을 찾지 못해 국민은 방황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금기를 깨고 타도의 대상인 자본가를 받아들이면서까지 청산한 아Q의 ‘정신적 승리법’에 이젠 거꾸로 우리가 중독된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다양한 세력이 내놓는 혁신과 성취의 동력을 거부하는 ‘배제의 정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절망이 분노로 전환되기 전에 치명적인 중독에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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