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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Live] 실크로드 희귀유물, 한국에 있는 까닭

바람아님 2016. 4. 28. 08:50
매일경제 2016.04.27. 20:04

[한국사LIVE-6] 동서 대상교역 중심지였던 실크로드는 4세기 이후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한다. 그 시기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불교시설이 건설된다. 실크로드는 그러나 20세기 초 신해혁명의 격변기 속에 서구 열강의 희생물로 전락해 귀중한 유물 대부분이 약탈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토의 니시혼간(西本願)사 주지였던 오타니 고즈이(1876~1948년)는 탐험대를 조직해 1902~1903년, 1908~1909년, 1910~1914년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실크로드 벽화와 불상 등을 반출했다. 2차 탐험대 일원이던 노무라 에이자부로는 수집품이 나무상자 45개에 담겼고 이 중 5상자는 벽화라고 일기에 썼다. 그러나 오타니는 사찰 내 횡령 사건이 불거지면서 주지를 그만두게 되고 그 일부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된다. 그러다 갑작스레 광복을 맞으면서 유물도 국내에 그대로 남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현재 박물관 수장고 등에 보관 중인 이들 실크로드 유물을 집대성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 종교회화'를 지난 5월 펴낸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실크로드 회화는 72건, 77점이다. 이 가운데 벽화가 60건, 62점이며, 종이나 직물에 그린 그림이 12건, 15점이다. 현재까지 주제와 출처가 확인된 유물은 31건, 38점이다. 마니교 회화로 추정되는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교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 베제클리크 석굴의 서원화
▲ 베제클리크 석굴의 서원화
이들 중앙아시아 종교회화는 오타니가 수집한 것이라고 해서 흔히 '오타니 컬렉션'으로 불린다. 오타니 컬렉션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있었지만 종합적인 결과물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박물관측 설명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무사했다. 파손의 위험이 커 1.4후퇴 때까지도 피난가지 못한 채 중앙박물관 진열관 2층 창고에 머물러 있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앞두고 당시 박물관장이던 고 김재원 씨(현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부친)가 부산으로 가져갔다. 고 김재원 씨는 그의 저서에서 "(2차대전 때) 베를린의 서역벽화 책임자가 벽화 파괴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생명을 끊은 일을 안다. 1.4후퇴 이후 3개월간 부산에서 걱정이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직원을 서울로 보내 4주 동안 포장을 끝냈다"고 회고했다.


오타니 컬렉션은 미국에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태평양전쟁 후 맥아더사령부는 우리 정부에 서울에 있는 서역벽화의 안부를 물 으면서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재이니 잘 보관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벽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베제클리크 석굴에서 가져온 유물이 26점으로 가장 많고 야르호 석굴 5점, 쿰트라 석굴 4점, 키질 석굴 2점, 미란사원 1점 등 순이다.

▲ 베제클리크 석굴의 천불도
▲ 베제클리크 석굴의 천불도
투루판(吐魯蕃)에 위치한 베제클리크 석굴은 위구르 왕실의 종교적 성지였고 다양한 언어로 쓰인 숱한 불경 사본과 여러 시기에 걸쳐 그려진 천불도(千佛圖)를 소장하고 있는 '불교문화의 보고'다. 베제클리크 벽화는 무릎을 꿇고 앉아 슬퍼하는 승려, 옷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승려, 근육이 과장되게 표현돼 있는 악귀 등 인물들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다.

부처가 전생에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서원화(誓願畵)와 역시 서원화의 일부이면서 갑옷을 입은 2명이 공양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그림은 수작으로 평가된다. 오타니가 불교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만큼 독일, 러시아, 영국 등 실크로드에 관심이 높았던 서구 국가에 비해 훨씬 수준 높은 유물을 수집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한다.


269개의 석굴이 군을 형성하고 있는 쿠차지역 키질 석굴의 벽화는 부처가 나가왕으로 태어났을 때 공덕을 쌓은 이야기를 표현한 그림이 대표적이다. 인도, 이란의 영향을 받은 키질 벽화는 다른 곳과 달리 동그란 얼굴 형태를 띠고 푸른색의 안료를 많이 사용했다.

뤄창현에서 북동쪽으로 50㎞ 떨어진 미란사원 벽화는 뚜렷한 이목구비, 큰 눈 표현과 날개를 지닌 천사 모습 등 서양 고전양식의 영 향을 받은 게 특징이다.
▲ 둔황 여행하는 승려
▲ 둔황 여행하는 승려
미란사원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전생 이야기 중 하나인 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도(本生圖) 일부가 목록에 포함돼 있다.

110개 석굴이 현존하는 쿠차 쿰트라 석굴의 유물로는 한족 계통으로 8~9세기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불도가 있다. 천불도는 불법이 우주에 널리 퍼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쿰트라 천불도는 베제클리크 천불도에 비해 간략하게 묘사돼 있다.


직물, 종이 그림의 경우 적외선 사진 등을 통해 완성된 그림과는 차이를 보이는 밑그림과 기존 그림을 재활용한 흔적이 확인됐다. 관음보살이 그려진 번(예불용 불화)의 소재는 면이며 크기와 구성이 베를린 아시아미술관에 소장된 것과 흡사하다. 종이 그림으로는 여행하는 승려가 있고, 견 위에 먹으로 보살을 그린 번도 다수 있다.


의도치 않게 우리의 손에 들어온 서역벽화. 편린에 불과하지만 1600년 전 사막 한가운데서 꽃피운 문명의 수준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낯선 유물들이 실크로드와 고대 한반도 문화의 연결고리를 찾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배한철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