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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6] 병명(病名)

바람아님 2013. 7. 10. 08:35


세계보건기구는 그동안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enza)'로 불렀던 신형 인플루엔자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인플루엔자 A형(A1H1)'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 신형 인플루엔자가 돼지로부터 감염되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종 전염병을 돼지와 연관 짓다 보니 한때 돼지고기 판매가 격감하여 삼겹살집과 양돈업계에 큰 피해가 갔다. 

돼지고기 문제에 민감한 일부 이슬람권 국가들에서는 돼지고기 수입과 판매를 금지하고 돼지 사육농장을 폐쇄했는가 하면, 심지어 이집트에서는 40만 마리에 달하는 돼지를 모두 살(殺)처분하려고 했다. 이는 다시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 신도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도(콥트인)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했다. 병의 실체와 무관하게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이처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병명을 놓고 가장 치열하게 다툰 사례로는 매독을 들 수 있다. 이 병은 역사상 가장 남에게 미루고 싶은 병이라 할 만하다. 매독의 기원에 대해서는 1490년대에 처음 발병한 사실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을 연결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의 병이 유럽으로 들어왔다고 보는 견해와, 구대륙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병이 마침 이 시기에 병세가 악화되어 나타났다는 견해, 그리고 구대륙과 신대륙 모두에 존재했었다는 견해 사이에 아직도 명백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모호한 상태에서는 일단 병의 기원을 남에게 돌리려 하게 마련이다.

1530년에 이탈리아의 의사이자 시인인 프라카스토로가 〈대발진 혹은 프랑스병(Syphilis sive morbus gallicus)〉이라는 라틴어 장시를 출간함으로써 이 병은 시필리스(syphilis)라는 공식 명칭과 프랑스 병이라는 별명을 동시에 획득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독일영국에서는 오랫동안 이 병의 이름이 프랑스 병이었으나 정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병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에스파냐 병, 포르투갈에서는 카스티야 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병, 터키에서는 기독교 병, 페르시아에서는 터키 병, 일본에서는 포르투갈 병 혹은 중국 병으로서, 병명 자체에 이웃에 대한 악감정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병만큼이나 인간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 사람들의 편견인 것 같다.

(출처-조선일보 2009/06/17  주경철,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