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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12] 역사의 더딘 전진, 빠른 후퇴

바람아님 2016. 9. 6. 06:54

(출처-조선일보 2016.09.06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사진지난해 출간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은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이슬람박애당 당수가 승리하는 
상황을 가정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이슬람이 집권하자, 거리의 분위기는 무겁고 고속도로는 텅텅 빈다. 
섹시하던 여자들 의상도 때깔 없는 바지와 헐렁한 긴 블라우스로 바뀐다. 직장에서 여성은 사라지고, 
그간 은밀하게 이슬람에 동조하던 인사들은 출세하고 열다섯 살 소녀를 아내로 더 들인다.

터무니없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설 전개가 흥미롭고 생생해서 좀 오싹하기도 했는데, 
우연히 보게 된 40년 전과 후를 대조한 두 쌍의 사진이 그것이 소설에나 나올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한 쌍의 대조는 1972년 카불 시내 거리를 세 명의 여학생이 셔츠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신나게 떠들면서 활보를 하는 모습과 2012년 세 여성이 니캅(눈 부분마저 촘촘한 망을 댄 부르카)을 
쓰고 맥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또 한 쌍의 대조는 1970년 테헤란에서 화사한 상의와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학생들이 활기찬 모습으로 수업을 받는 풍경과 
2009년 비슷한 교실에서 여학생들이 모두 까만 차도르를 쓰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카메라 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두 쌍의 사진을 보면서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리는 것이 단칼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임을 
깨닫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쟁취한 진보가 단 하루 만에 물거품이 된 
예는 허다하다. 
대부분은 현 체제의 부패와 독재에 대한 반감이 국민을 혁명에 
호응하게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혁명은 절대적 독재라는 
수단으로 유지되며 차차, 무섭게 부패해간다.

이제는 통일을 '대박'으로 기대하는 국민은 많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는 어쨌든 통일이 되면 
남한이 북한 동포를 압제와 가난에서 구해주는 시혜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북한이 완성된 핵무기로 남한을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하면 우리는 허둥거리다가 
북한에 '접수'되어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때, 콧대 높은 민주시민이던 우리가 사상범 수용소나 탄광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주체사상의 광신도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은 하지 못한다.

우리 지도층이 대오 각성해 자정(自淨)으로 국민의 반감을 불식하고 국민도 서로 반목과 갈등을 해소할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지난 100년의 시련을 통해 얻은 성과가 일순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1] 영국 고립주의의 뿌리(2016.06.21)


[2] 미국을 다시 백인의 나라로?(2016.06.28)


[3] 民辯, 21세기 한국의 돈키호테들(2016.07.05)


[4] 여자 목숨, 파리 목숨(2016.07.12)


[6] 테러의 현장에서(2016.07.26)




[인문의 향연] 세계는 저녁처럼 어둡고


(출처-조선일보 2015.11.30 정미경 소설가)


테러는 영혼에 균열 일으켜 파리 테러 이후로 
온 세상에 이해하려 들지 않는 타자의 아우성 가득 차
살아보지 않은 타자의 삶 속으로 살아보게 끌어주는 게 문학의 힘

정미경 소설가 사진세마라는 춤이 있다. 특이하게 남자들만 출 수 있는 춤이다

끝자락이 퍼지는 스커트와 원추형 펠트 모자가 기본 의상이다. 

제 몸을 축으로 하염없이 회전하는 게 전부인 단순한 춤사위지만 춤추는 자는 어느 순간 허공으로 

떠오를 것 같은 황홀경에 이른다 한다. 경배하듯 두 팔을 들고 돌면 스커트는 만개한 꽃처럼 허공에 

펼쳐진다. 특유의 타악 리듬과 함께하는 그 광경이 아름답고 평화롭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마는 이슬람 신비주의 계열인 수피댄스의 일종이며 제의에서 비롯된 영적인 춤이다.

지난 (2015.11.) 13일, 파리 번화가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금요일 밤을 즐기러 나온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총을 쏘아댔다. 

전 세계가 리얼타임으로 우리 곁에 출몰한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 

파리 시내를 지옥으로 만들고는 제 몸에 두른 자살용 폭탄 벨트의 버튼을 누른 건 이슬람국가(IS)의 조직원들이었다.


세마와 자살 테러. 극단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이슬람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명확히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혹시 그날 저녁 부활했다면 가장 경악했을 사람은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건 내가 만든 그 종교가 아니야! 절규하며.

공쿠르상 수상 작가인 미셸 우엘벡은 올 초에 '복종'이라는 소설을 냈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 안락사, 자유와 방종, 현대 예술에 대한 비판 등으로 책을 발표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던 

그이지만 이번 책은 유난히 떠들썩했다. 마침 마호메트를 희화화한 시사만평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태와 겹치면서 

단숨에 유럽을 넘어선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동시에 반인종주의 논란에 휩싸였다.

이 논쟁적 소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가까운 미래의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이 당선된 후의 프랑스 사회를 그린 가상 소설이다. 

재미있는 건,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이슬람 통치하의 사회가 

나름대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범죄는 줄어들고 히잡을 두른 여성들은 다소곳해진다. 

능력에 따라 아내를 여럿 둘 수 있는 제도에 힘입어(?) 

남자들 역시 빠르게 혹은 마침내 이슬람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하게 된다. 

어떤 지역엔 이미 이민자가 원주민보다 더 많아진 유럽 사회의 내밀한 불안과 이슬람포비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우엘벡 자신은 "이 책은 이슬람 혐오주의 소설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원한다면 우리에겐 이슬람 혐오주의 작품을 쓸 권리가 있다"며 까칠하게 토를 달긴 했지만.

파리 테러 무렵, 하필 나는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고 있었다. 

하필이라고 한 까닭은, 이 소설이 미국의 주류 사회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9·11 이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취급받게 되는 파키스탄 청년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파리 테러를 전후로, 타인의 고통 앞에 제 신장이 아파질 만큼 착하고 예민한 그 청년을 향한 

내 마음에 미묘한 싸늘함이 스쳐갔다. 테러란 이런 것이다. 

우리 영혼에 보이진 않지만 선명한 균열과 증오를 일으킨다. 

프랑스 역시 국가 정체성과도 같았던 톨레랑스(관용)를 일단 밀쳐두고 전시 상태로 돌입했다.

첫눈이 내렸고 잎을 떨군 나무들은 최소한의 몸으로 겨울을 날 채비를 마쳤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 타자들의 아우성으로 세계가 가득 찼다고 느껴진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한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제목과 달리 이 두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 

치밀하고 깊숙하며 풍성하다. 

그리고 모든 좋은 소설이 그러하듯 세계를 보는 렌즈가 되어주는 동시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도 한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생 속으로 불쑥 들어가 볼 수 있는 것. 

다른 종족, 다른 직업, 다른 성이 되어 다른 장소에서 살아보는 것. 

오직 문학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우기진 않겠지만 말이다.




복종 : 미셸 우엘벡 장편소설 

미셸 우엘벡/ 장소미/ 문학동네/ 2015/ 374 p

863-ㅇ537ㅂ/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강서]3층문학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왕은철/ 민음사/ 2012/ 169 p

808-ㅁ494ㅁ-60/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강서]3층문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