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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그리운 선생님

바람아님 2016. 10. 11. 11:11

(조선일보 2016.10.11 길해연·배우 김도원 화백)


길해연·배우

콧물이 흐르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감기다. 촬영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리 펴고 누웠다.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새벽 4시, 눈 속에 모래알을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리고 쓰리다. 

끔뻑끔뻑 눈꺼풀을 움직여 보는데 책장 귀퉁이에 비죽 고개를 내민 책 한 권이 영 눈에 거슬린다. 

빼어 들고 보니 조셉 체이킨의 '배우의 현존'이다. 

골이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책장을 뒤적여 본다. 

두 눈이 번쩍 뜨인다.


'윤영선 옮김.' 세상에… 이게 윤 선생님이 번역하신 거였구나. 

연출가이며 극작가이셨고 우리 또래 연극인들에겐 훌륭한 스승이자 좋은 친구였던 선생님은 2007년 고인이 되셨다. 

이승과 저승 사이 잠시 면회 시간이라도 주어진 것처럼 허겁지겁 역자 후기를 펼쳐본다.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새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내는 소리인 줄 알았다는 선생님은 이렇게 후기를 적어 놓으셨다.


"그 전날 내가 좋아하는 연출가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연극의 현실성에 대해서, 호환성이 불가능할 만큼 찢겨 나간 우리의 삶에 대해서, 

더욱 깊어진 삶의 억압에 대해서 얘기하다 함께 술을 마셨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열변을 토하던 어떤 시간들이 떠올라 눈알이 따끔거리는데 마주 앉았던 연출가에 대한 묘사가 나를 웃게 만든다. 

마른 얼굴에 특별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띄엄띄엄 말을 잇던 연출가는 누구였을까?


유독 나무를 사랑하던 선생님, 평상시엔 별말씀 없으시다가 연극 얘기만 나오면 엄청난 수다쟁이로 돌변하던 선생님. 

작품을 한다는 것은 한 움큼의 바늘을 집어삼킨 뒤 노래를 하는 것 같다던, 

글을 쓰고 연극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늘 삼킨 자의 노래를 들어 주는 관객이 있기 때문이라던 

선생님은 나무로 태어나 새의 둥지가 되고 싶다 하셨다.


요즈음의 나를 보면 뭐라 하시려나. 추운 겨울 어느 날 성북동 포장마차에서 처럼 

그렇게 마주 앉아 하품을 하며 잔소리라도 한마디 듣고 싶어진다. 

감기 탓인가. 창밖으로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