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설왕설래] 삶은 계란이오

바람아님 2016. 12. 22. 23:34
세계일보 2016.12.22 01:25

“삶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묻자 김수환 추기경이 말했다. “삶은 계란이오.” ‘삶’은 인생이란 뜻을 지니고 있지만 냄비에 삶는다는 의미도 있다. 추기경의 대답은 그 둘을 절묘하게 버무린 우문현답이었다.


계란은 병아리의 세계다. 병아리가 태어나려면 자신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껍질은 손가락으로 살짝만 눌러도 쉽게 깨질 것 같지만 병아리에게는 콘크리트 벽만큼이나 단단하다. 병아리는 연약한 부리로 몇 시간이고 힘들게 껍질을 쪼아댄다. 만약 그 모습이 안쓰러워 누군가 껍질을 깨어준다면 병아리는 쉽게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나온 병아리보다 더 병이 들고 잘 죽는다고 한다. 혼자 사투를 벌이며 자생력을 키우는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스스로 껍질을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어주면 계란프라이가 된다. 추기경이 말한 ‘삶은 계란’에는 아마 이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참된 삶을 살려면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일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스스로 고독한 싸움을 통해 부화해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자신의 껍질 속에 갇히면 삶은 부활할 수 없다. 계란프라이와 같은 ‘죽은 인생’이 되고 만다.


요즘 계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대형마트에서 계란 판매를 제한하고 값을 올리자 황금알로 둔갑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급기야 정부가 수급 안정을 위해 산란용 닭과 계란을 항공기로 긴급 수입하는 방안을 모색할 정도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로 닭이 대거 살처분된 여파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도 크게 작용한 모양이다. 중간 유통상인들이 매점매석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생명이 산 채로 묻히는 생지옥 와중에서도 자기 배를 채우는 인간의 탐욕이 무섭다.


황금 계란 시대가 왔지만 삶의 질은 거꾸로 추락한다. 그것은 비단 국정농단 세력과 같은 거악 탓만은 아닐 것이다. 타인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이기심이 근본 뿌리다. 자기 잇속의 껍질에 갇혀 부화하지 못한 미숙한 영혼 말이다. 추기경의 말씀은 다시 생각해도 명언이다. 역시 삶은 계란이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