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면에 법 집행 잘못 두려워하며 보고하는 내용 새겨
신라 법률이 지방까지 엄격히 시행됐다는 첫 물증
'급벌척' 등 사서 안보이는 관직명들도 나와 눈길
신라시대 지방 관리가 경주 중앙 관청에 법을 잘못 집행했다고 실토하며 올린 반성문 성격의 보고서가 발견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4~16년 경남 함안에 있는 신라시대의 성산산성터를 발굴조사하다 나온 목간 23점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6세기께 신라 지방관의 보고서 내용이 4면에 모두 새겨진 목간(나무쪽 문서)을 확인했다고 3일 발표했다. 연구소가 낸 자료를 보면, 이 목간은 4면에 모두 글자 56자를 새겼는데, 당시 함안 일대로 추정되는 진내멸(眞乃滅)의 촌주가 중앙에 올린 보고서 형식을 띠고 있다. ‘급벌척(及伐尺)’이란 직위를 지닌 신라 관리에 대해 행정 법률을 집행했는데, 잘못 집행돼 두려워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뢴다고 보고하는 내용이다.
이번에 확인된 이 보고서용 사면 목간은 6세기초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년)때 처음 제정된 법률 제도인 율령(律令)이 이후 지방까지 널리 시행되고 있다는 점을 처음 실체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특히 목간 내용 중에 나오는 ‘□법삼십대(□法三十代)’, ‘육십일대(六十日代)’ 등의 표현은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한 옛 법률 용어로, 당시 신라가 율령을 통한 지방 통치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연구소 쪽은 “목간의 중심시기로 보이는 6세기 중반께 신라 지방사회에 문서행정이 구체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당대 신라 율령의 적용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다.
신라 경주에 거주하는 왕경인을 대상으로 한 관직 체계인 경위(京位)의 관등 이름이 처음 확인된 것도 주목된다. 그동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는 신라 지방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관등체계인 외위(外位) 관등명만 나타난 바 있는데, 이번에 확인된 사면 목간에서는 경위(京位) 중 12등급인 ‘대사(大舍)’ 관등명이 발견돼 성산산성이 중앙정부의 직접 통제 아래에 있었음을 알게 됐다. 또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 나오지 않는, ‘급벌척(及伐尺)’이라는 외위 관등명이 새로 판독된 것도 눈길을 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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