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9.14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미국 유학 시절 아내와 나는 부부싸움을 늘 영어로 했다. 부부싸움이야말로 미주알고주알 짚고 따져야 할 것이 많은 법인데 왜 꼭 그 서툰 영어로 했을까? 그건 아마 모국어로 하는 싸움보다 외국어로 하는 싸움이 감정을 분리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I hate you" 또는 심지어 "I REALLY hate you"를 수없이 내뱉었지만, 그건 우리말로 "나 너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부부가 서로 정말 싫다고 말할 정도면 그건 이혼 일보직전일 것이다.
그 후 미국 친구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나는 그들 역시 'hate'란 단어에 그렇게 대단하게 감정을 싣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리석다'는 뜻의 'stupid'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내 아들 녀석도 툭하면 "Dad, are you stupid?"라며 힐난하지만, 그건 결코 "아빠, 바보야?"와는 다른 것이다.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아마 단 하루도 국민들로부터 'stupid'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국민이 그를 탄핵하기 일보직전은 아니었다.
아이돌 그룹 2PM의 재범이 어린 소년 시절 친구와 나눈 지극히 개인적인 대화에서 이 두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 인터넷이라는 고삐 풀린 괴물 그물에 걸려 급기야는 그룹을 탈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세계화 시대에 살면서 이 정도의 문화 혹은 언어의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수의 'stupid' 네티즌들이 어쭙잖게 전 국민을 대변하는 양 그에게 우리말로 "우린 너 싫으니 꺼져라"를 외친 것이다. 그 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돌아서는 재범을 보며 나는 그가 지난 몇 년간 한국에 살면서 어느덧 한국인이 다 되었구나 하고 느꼈다. 만일 우리 네티즌들이 영어로 그를 비난했다면 어쩌면 그는 이렇게까지 가슴 아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귀와 가슴 사이에는 엄연한 간극이 존재한다. 아무리 험한 말이 귀로 들어와도 그걸 가슴이 받지 않으면 그 충격은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손가락은 더 멀다. 재범에게 자살까지 권유한 네티즌들이 과연 그를 마주 보고 말로 할 수 있었을까? 무책임한 손가락들이 사이버 공간에 던지는 돌들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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