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떠나고 싶다"는 그곳 처녀, 韓流 드라마 보며 한국말 '열공'
'노인과 바다'의 어부 산티아고는 "희망 없이 사는 것은 罪"라 말해
국내 뉴스 우울해도 희망 잃지 말길
설 직전에 지구의 반대편 쿠바에서 3개월 만에 돌아온 나는 아직도 시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14시간의 시차지만 40년 정도의 체감 시차. 타임캡슐을 타고 순간 이동했다 온 듯 혼란을 느낀다. 인터넷 시설도 물자도 부족한 그 나라에서는 익숙했던 욕망들을 비우고 1970년대처럼 단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3개월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대단했던가. 그새 나라는 온통 뒤집히고, 인터넷과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국내외의 뉴스가 기껏 비우고 온 내 심신으로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설 전날 명절 장을 보는 대형 수퍼에서 나는 길을 잃고, 온통 시야 가득 들어찬 물건들에 어지럼증이 나서 숨을 고르곤 했다. 넘쳐나는 물건들을 보니 가난한 그곳 사람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한류 드라마에 빠져 한국어를 공부하는 쿠바 처녀 알리시아. 내가 젊은 그녀에게 꿈을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 "내 꿈은 무조건 이 나라를 뜨는 거예요." 그녀는 친한 친구의 가족이 집을 팔고 물건을 처분해서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돈이 없으니 떠나진 못하고 닥치고 다른 나라 드라마나 볼 수밖에요."
요즘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으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반대로 쿠바에서 56년 전에 쫓겨난 미국인이 있었으니,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그는 노벨상 수상 인터뷰에서 자신을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라 할 정도로 제2의 고향 쿠바를 사랑했다. 말년에 20년간 그곳에 살면서 위대한 작품들을 썼지만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듬해인 1961년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무엇이 그를 '파괴'한 것일까.
아바나에 있을 때, 그에게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마지막 소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정독했다. 소설의 배경이 된 아바나 동쪽의 어촌인 코히마르를 방문했다. 소설에도 나오는 카페 라테라사에는 낚시대회에서 우승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찍은 사진과 바다낚시를 즐겼던 그의 모습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살면서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던 저택 핑카 비히아에도 다녀왔다. 그곳은 창밖에서 "헤밍웨이씨!" 하고 부르면 당장에라도 집 안 어디에서 그가 나올 듯, 당시의 일상 모습을 간직한 채로 시간이 박제되어 있었다. 주인 잃은 그 집엔 최근 부쩍 늘어난 미국 관광객들이 북적댔다. 아바나는 헤밍웨이의 성지나 마찬가지였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멕시코 만류에서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운이 다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모처럼 큰 청새치를 며칠간 힘겹게 잡았으나 상어 떼의 습격으로 뼈만 가지고 항구에 돌아온다. 그 며칠간 망망대해에서 물고기, 아니 자기 자신과의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투를 그린 게 줄거리다. '노인'과 '바다'는 요컨대 '인간'과 '인생'에 대한 메타포다.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는 말한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지."
다치고 상처 입고 상어 떼에게 다 뜯긴 물고기의 뼈만 갖고 돌아온 노인을 패배자로 볼 수 있는가. 그의 패배가 아름답다면, 죽음을 코앞에 느낀 순간까지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때문일까.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심지어 그것은 죄다."
우울한 뉴스의 나날이지만 그래도 설을 맞이했으니 강인한 노인의 말을 빌려 희망을 희망하고 싶은 게 나의 희망이다.
※ '인문의 향연'은 이번 회부터 권지예씨가 맡습니다. 이화여대 영문과 졸, 프랑스국립파리7대학 문학박사, 단편 '꿈꾸는 마리오네트'로 등단, 이상문학상(2002), 동인문학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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