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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세상] 도깨비장난에 당했다고? 내가 쌓은 業일 뿐

바람아님 2017. 2. 8. 23:30
조선일보 2017.02.08 03:03

도깨비, 귀신, 저승사자 없지만 세상사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냐
예기치 않은 사고 당하면 '도깨비장난 같다' 말하지만 원인 따져보면 결국 내가 쌓은 業
그러니 하루도 함부로 살 수 없어

한밤중에 나그네가 숲길을 걸어간다. 달빛 닮은 여인이 나타나 그를 유혹한다. 그녀의 오두막에서 기분 좋은 하룻밤을 보낸 나그네, 아침에 일어나니 부지깽이 한 자루를 안고 있었다. 지난밤 그를 유혹한 아름다운 여인은 백 년 묵은 여우 혹은 도깨비였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이 땅의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캄캄한 밤이 만들어낸 환상은 얼마나 찬란하고 쓸쓸한가.


화제의 드라마 '도깨비'가 최근 끝났다. 도깨비가 있을까, 저승사자·귀신이 있을까 화제도 만발했지만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을 어찌 있다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존재, 명명할 수 있는 존재만 살고 있다 해야 할까. 나는 그 가설이 더 답답하다. 삼국유사에는 경주 황천의 언덕에서 밤마다 귀신들과 놀던 신라의 귀신 대장 비형랑 이야기가 나온다. 진평왕의 명령을 받아 귀신을 동원해 다리를 놓기도 했던 그는 귀신들의 리더였다. 그 다리는 귀신들이 놓았다고 해서 귀교(鬼橋)인데, 귀교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룻밤 사이에 생겨났단다.


인생엔 정말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건설되기도 하고, 하룻밤 사이에 막강했던 권력이 무너지기도 한다. 하룻밤 사이에 이름을 얻기도 하고, 하룻밤 사이에 감옥 갈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하룻밤 사이에 누가 이런 일을 만드는가. 그러니 귀신 곡할 노릇이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그런 일은 귀신의 도움 혹은 저주, 다시 말해 귀신의 장난이 아닐까, 하여.


귀신들을 이끌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비형랑의 아버지는 신라 25대 진지왕이었다. 왕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 사량부에 사는 도화 부인의 자태가 도화꽃처럼 아름답다는 거였다. 보지 않고도 욕망은 커질 수 있는 것이었다. 젊은 왕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도화 부인을 불러들였다. 여자는 남편이 있다며 단호하게 왕을 거절했다. 권력이 매력이라고 착각한 왕은 분명 어리석었으나 그 민망한 상황에 화나 내는 졸장부는 아니었나 보다. 그는 싫다는 여자를 일단은 존중해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집요하게도 여자의 약속을 받아냈다. 남편이 없으면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었다.


진지왕은 그해 폐위되고 죽었다. 당연히 여자는 그 약속을 지웠을 것이었다. 그리고 2년 후 여자는 남편을 잃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죽은 왕이 여자를 찾아와 까맣게 잊고 있었을 그 약속을 상기시켰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왕은 7일간 머물렀다. 그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후 왕은 사라지고 여자의 몸엔 태기가 생겼다.

죽어서도 죽지 않는 것이 있나 보다. 다 태우지 못한 진지왕의 염원 같은 것. 그래서 법구경은 재산도 벼슬도 모두 쓸고 가는 죽음 후에도 남는 것을 업(業)이라 했다. 죽어서도 죽지 않은, 지극할 수도, 끔찍할 수 있는 그것!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그 아버지가 어떻게 통치했는지 보인다. 절대 권력 아버지의 권위적 태도만 닮은 딸을 보며 업 혹은 삶의 태도가 어떻게 남는지도. 자식이 부모의 운명을 반복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살아가는 방식이나 태도를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기치 않고 기대치 않은 사건을 도깨비장난이라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의 원인은 '나',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겠다. 하룻밤 사이에 권력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룻밤 사이에 드러났을 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듯 스스로 망치는 자를 망친다. 그러니 함부로 살 수 없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늘이므로.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를 낳는 것이므로.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도깨비장난의 원인일 테니.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