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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글감 찾기

바람아님 2017. 3. 15. 21:51

(조선일보 2017.03.10. 고군일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고군일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생명력이 긴 작가는 대개 소재가 풍부하다. 그런 점에서 동료 작가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내 택시에 타는 사람마다 소재를 제공해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긴 하나 글감이 될 만한 승객을 만나는 건 마른 날에 벼락 맞는 격처럼 흔치 않은 일이다. 

어느 추운 날 밤, 정말로 그 벼락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신림역 근처에서 중년 사내 둘이 내 택시를 탔다. 

술이 웬만큼 된 둘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지방에서 온 친구와 그 친구를 자기 집에 재우려는 사람이었다.

승객이 길을 안내하며 들어가자고 한 골목은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큼 좁은 오르막이었다. 

차를 돌릴 곳이 없을까 봐 걱정됐지만 "집이 골목 끝에 있다"는 사내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골목이 가팔라 차 앞부분에 가려진 길을 양쪽 벽으로 가늠하면서 올라갔다. 

한참 뒤 정상을 넘은 듯해서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앞 타이어가 텅텅 두 번 떨어지더니 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첫눈에 들어 온 풍경은 아랫길로 연결된 수십 개의 계단이었다. 아찔했다. 

차체가 길바닥에 얹혀 곤두박질을 면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문제는 사내 둘이 차를 들며 밀어도 타이어가 헛돌아 후진이 안 되는 거였다. 막막했다.


[일사일언] 글감 찾기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또냐?" 하는 표정으로 그 동네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다가와 운전대를 잡아줬다. 

나까지 셋이서 죽을 힘을 다해 차를 겨우 계단 위로 올려놓고는 안도할 새도 없이 허탈해졌다. 

사내의 집은 이 골목이 아니었다. 이사 온 지 며칠 안 돼 골목을 착각했다는 것이다. 

씁쓸했지만 차를 돌려 내려가다가 골목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단에서 굴러 죽은 혼령들이 한밤중에 신명나게 노는 무대가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희곡으로 써서 상도 받고 공연도 올리는 행운을 얻었다. 

동료 작가들에겐 맥주잔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