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화면 가화리 화옥마을 오랜 세월 척박했던 땅.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는 강했고, 집착은 끈질겼다. 강하고 질긴 태도와 능력으로써만 세상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쌓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밝고 슬프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 설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쌓여 전해져오고 있다. 전남 고흥군을 다시 찾는 이유다. 지난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고흥군의 땅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이들을 만난 스포츠동아는 올해에도 그곳으로 간다. 사람들이 전하는 오랜 삶의 또렷한 흔적을 확인해가며 그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한다. 격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
‘아주아주 자그마한 꽃씨가
딱딱한 땅을 뚫고 올라왔네
아주아주 자그마한 꽃씨가 세상을 물들이는 꽃이 되었네
아주아주 자그마한 꽃씨가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었네’
외동딸로 태어나 시를 사랑했던 소녀 혼인과 함께 벼루와 시첩은 내쳐지고 꿈이 잠긴 바다에 우뚝 솟은 바위 하나 하늘과 바람과 꽃과 나무를 노래하네 “하늘과 바람과 꽃과 나무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세상과 자연과 꿈이 심상에 젖어 들었다. 문 밖 사람들과 그저 세상과 자연과 꿈을 나누려 했다. 어떻든,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詩)는, 그저 꿈이었을 뿐이다.
● 외동딸의 슬픈 꿈 소녀는 시를 읊조리곤 했다. 하지만 읊어진 시는 문밖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시대의 억압과 차별은 소녀와 시와 꿈을 가로막는, 어찌할 수 없는 질곡이었다. 글을 배워 “하늘과 바람과 꽃과 나무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아홉 살 소녀는 양반의 부모가 어렵게 얻은 외동딸이었다. 시를 쓰기 원하는 딸의 꿈을 아버지는 내칠 수 없었다. 그래도 반상과 남녀의 차별이 분명했던 때였다. 단지 금지옥엽의 지극한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아홉 살 소녀의 감성이 그만큼 웅숭깊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끼는 벼루 하나를 내어 주었다. 딸은 거기에 먹을 갈았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고, 소녀는 먹을 갈아 배운 글로써 시를 썼다. 하지만 소녀는, 당대 수많은 또래들처럼, 장차 ‘여염집 아녀자’로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남자와 혼인했다. 한평생 시와 함께 살고 싶은 꿈은 속으로, 속으로만 삭여야 했다.
곰삭은 꿈은 이내 드러나 시심(詩心)을 채웠다. 시는 혼인하던 날 싸온 벼루와 붓과 종이와 시첩은 소녀의 속 깊은 곳에서부터 꺼내어졌다. 봉건의 차별의식으로 굳건한 시어미와 신랑의 눈을 피해 시는 종이 위에 꿈으로 피어났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했다. 시어미는 소녀의 꿈을 내쳤다. 벼루와 시첩 등도 내치어졌다. 소녀는 밤마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베갯잇을 적셨다.
벼루는 바다에 버려졌다. 잔잔한 거품도 일으키지 못한 채 소녀의 꿈도 어이 없이 수십 리 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이를 바라보며 소녀는 벼루를 향해 나아갔다. 나아간 물길. 소녀에게 그것은 세상이 차갑게 빼앗아간 꿈이었다. 물길의 끝에서 소녀는 “하늘과 바람과 꽃과 나무와 이야기”하고 있을 터이다.
● 고즈넉한 바다마을의 풍경 벼루는 사연과 함께 낚시꾼 정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연은 한낱 허망한 꿈으로만 사그라진 소녀였다. 사람들은 벼루가 소녀의 억울한 눈물을 먹물로 한없이 쏟아내고 있다고 믿는다.
벼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떠오른 곳, ‘벼룻여’다. 고흥군 도화면 가화리 화옥마을. 남해의 물이 밀려와 바위와 부딪혀 물보라를 일으키는 곳, 그곳에 벼룻여가 있다. 실상 ‘여’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뜻하지만 이 곳에선 “탕건을 쓴 형상”의 3∼4미터 높이로 우뚝하다. 4월 말, 부둣가에서 제철인 실치를 잡기 위해 그물을 새로 엮고 있던 김정태(78)씨는 “고흥의 바다 가운데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고 수심도 깊은 곳이다”고 설명했다.
소녀와 꿈과 벼루가 잠겨든 곳도 어쩌면 여기였을 것이다. 설화에 따르면 낚시꾼 정씨는 벼루를 낚아 올려 집으로 가져갔다. 벼루는 그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도 정씨의 집안이 대대로 이 곳에서 살았다고 김씨는 말했다. 마을 황봉래(72) 이장은 “정씨 집안의 묘가 있었다”고 보탰다. 하지만 이제 화옥마을엔 그 후손이 살지 않는다. 김씨의 손을 돕던 최용우(59)씨와 황 이장은 “최씨와 김씨가 많이 산다”고 밝혔다. 김정태씨는 “아마 육지에서 가장 오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이 곳은 ‘꾸둘리’로 불렸다. “굶어죽는 이가 나올 정도로” 마을이 너무도 가난해 이웃마을에서 매년 쌀을 융통해 삶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결국 이름을 바꿨고, ‘벼가 구슬’이라는 뜻의 ‘禾玉(화옥)’이 되었다.
지금이야 김과 미역 등 풍부한 해산자원과 양식으로 비교적 풍요로워진 마을. 35가구 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바다마을의 한쪽 마당에서 아낙들은 남정네들이 잡아온 실치를 말리고 있었다. 꿈을 포기했다면, 어쩌면 소녀도 그 같은 풍경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4월 말 다 되어가는 저녁, 마을의 고즈넉한 풍광은 소녀와 소녀의 꿈이 품은 내력의 세월을 안고 있는 듯했다. 바다는 잔잔히 사위어가는 봄 햇살이 혹여 소녀와 소녀의 꿈이라도 되는 양 쉬지 않고 반짝였다.
※ 설화 참조 및 인용 : ‘시를 쓰는 벼룻여’(안오일, ‘고흥군 설화 동화’ 중)
● 설화
고흥(전남) |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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