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8.05 장강명 소설가)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단 세 단어로 이렇게 도발하기도 쉽지 않겠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말인즉슨 지금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렷다? 무슨 근거로?
'서양'은 뭘 뜻하고, '지배한다'는 개념의 의미는 뭔데?
책 제목이나 두께를 보아하니 논리적인 이유를 제시하겠다는 분위기인데, 설마 '서양의 지배'가 당연하다고 말할 참이야?
이거, 현학의 가면을 쓴 신종 유럽 우월주의 아냐?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시큰둥할지도 모르겠다.
그거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다 한 얘기 아닌가, 문명 발달 초기에는 세로로 길쭉한 대륙보다
가로로 늘어진 대륙이 유리하고, 중기에는 그런 유라시아에서도 해안선이 단조로운 중국보다 땅 모양이 들쭉날쭉한
유럽이 더 조건이 좋다고….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언 모리스는 이런 두 종류 비판에 대한 반론을 먼저 제시한다.
우선 '서양, 동양, 지배'라는 단어를 상당히 좁게, 그리고 꽤 설득력 있게 정의한다.
그리고 서양의 우세가 필연이었다고 보는 '장기고착이론'은 자연환경 요소를 너무 강조하고,
반대인 '단기우연이론'은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한다고 지적한다.
두 관점 모두 산업혁명 이전 수천년의 사회사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수천년에 집중하는데, 읽는 동안 저자의 진짜 질문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가 아니라
'문명은 어떻게 발전하는가'임을 깨닫게 된다.
책은 거대한 시야로 동서양의 역사를 살피며 사회학도 지리적 요소만큼 중요함을 보여준다.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708/04/2017080402870_1.jpg)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
이언 모리스/ 최파일/ 글항아리/ 2013/ 1006 p
909-ㅁ538ㅇ=2/ [정독]인사자실(2동2층)/ [강서]2층
동서양 어떤 강대국도 수백 년 이상 권세를 누리진 못했다.
초기에 그 나라를 일으킨 힘이 몇 세대 뒤에 반드시 걸림돌이 됐다.
그때 주변부 세력이 '후진성의 이점'을 업고 새 강자로 등장한다.
동양도 서양도 비슷한 단계에 대붕괴를 겪었다.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기 직전에 한 번, 제국이 농경사회의 한계에 부딪힐 때 다시 한 번이다.
익히 알던 사실(史實)을 재구성하는 관점의 위치가 까마득히 높아서, 웅장하다고 해야 할지
장쾌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읽는 내내 희한한 흥을 맛보게 되는 책이다(작가도 외계인의 시선으로 보자고 독자를 부추긴다).
로마-한나라, 르네상스-주자학, 합스부르크 왕가-도요토미 히데요시, 테오도라 황후-측천무후라는 식의 짝짓기를 접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저자가 고전과 대중문화 양쪽에 모두 해박하고 유머와 재치도 빼어난 데다 대체역사소설 기법까지 능수능란하게
써먹는 특급 글쟁이인지라, 1006쪽이 후다닥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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