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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칼럼] AI는 바둑계 최고의 '사부님'

바람아님 2018. 8. 1. 09:03

(조선일보 2018.08.01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형세 판단·복기 등 궁금증 해결, 박정환 같은 高手도 최신형 설치
성적 오르면 'AI 효과'라고 고백… 프로 기사 순위까지 좌우해


이홍렬 바둑전문기자이홍렬 바둑전문기자


알파고가 이세돌과 커제를 잇달아 꺾고 '은퇴'했을 때,

인공지능(AI)이 인간 사회를 실효 지배하는 시대가 과연 올지, 온다면 언제쯤일지에 관심이 쏠렸다.

1년여가 경과한 현재, 적어도 바둑계는 그런 시대에 진입했음을 매일 보고 느끼고 확인하고 있다.

먼저 실력 측면에서 인공지능과 인간 고수(高手)들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중국의 줴이(絶藝)가 커제를 2점 접고 꺾었고, 엘프고(ELF Go)는 지난봄 김지석·신진서 등 한국 최고 기사 4명을 상대로

20전 전승을 거두면서 인간계를 완전 평정했다.


페이스북이 제작한 엘프고와 벨기에산(産) 릴라제로(Leela zero)가 오픈소스로 공개되면서 바둑계 풍속도도 엄청나게

달라졌다. 바둑 도장(道場)에 가보면 원생들의 시선은 이 AI 프로그램들 모니터에 고정돼 있다.

최고 엘리트 집단인 국가대표 연구실도 예외가 아니다.

AI는 대국 파트너 역할은 물론이고 매 순간 형세 판단, 최선의 수, 복기(復棋)에 이르기까지 모든 궁금증을

확실하게 해소시켜 준다. 완벽한 '사부님'이다.


이 때문에 각 도장은 지난봄 이후 대형 컴퓨터 신규 구입에 나섰다.

경쟁 도장에 뒤지지 않으려고 저마다 3~4대씩 들여놓느라 출혈이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써도 이를 담아낼 하드웨어의 용량이나 기능이 처지면 천양지차의 실력을 보이는 게 AI의 특성이다.

도장 사범들의 존재도 왜소해졌다. 인공지능보다 하수(下手)로 밀려나면서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전용 컴퓨터 업체들도 호황이다.

이들은 설치가 꽤 까다로운 바둑 프로그램을 깔아주고 그에 적합한 컴퓨터를 추천·판매한다.

첨단 바둑 AI를 필요로 하는 고객층도 다양하다.

우선 '입단 고시'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프로 지망생들이 주 고객이다. 이들만 해도 수십 명은 족히 넘는다.

현역 프로기사도 상당수가 최신형 AI를 집에 설치해 공부한다.

박정환·신진서 같은 수퍼 고수도 예외가 아니라는 소문이다.


승부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람들이다 보니 경쟁자를 따라잡거나 뿌리치는 자구책으로 AI는 필수가 됐다.

일종의 비밀과외인 셈이다.

성적이 갑자기 뛰어오른 기사들은 자신의 도약 비결을 'AI 효과'라고 당당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고객 중엔 불법 베팅에 AI 분석을 이용하려는 세력도 포함된다.

대국 사이트들은 이들의 부정행위를 막을 프로그램 개발에 비상이 걸렸다.

올해 초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풍경들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공지능 성능과 구매력 간의 상관관계다.

AI 기능을 최고로 구현하기 위해선 높은 사양(仕樣)의 하드웨어일수록 좋다.

시판 중인 AI 전용 컴퓨터 가격은 최하 99만원부터 최고 1250만원까지 6종류다.

연간 억대 수입을 올리는 열 명 안팎의 기사를 제외하면, 1000만원 넘는 돈을 선뜻 투자할 수 있는 프로는 드물다.

프로 세계에서 성적은 수입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고성적→고수입→고사양→고효과란 고(高)의 순환 도식이 그려진다.

중위권 기사는 400만원짜리 중간급 AI로 공부하면서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부유한 집 프로 지망생은 고가 AI에 힘입어 입단 일정을 크게 단축시키고,

성적 열등생은 상위권 진입 기회가 갈수록 멀어질 수 있다. 금수저·흙수저 논리의 판박이다.

물론 단순화하고 극단화한 분석이지만 마냥 웃어넘길 일만도 아니다.


AI가 진화를 거듭하며 바둑계 현장을 뒤집어 놓는 것은 웬만큼은 상상이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첨단화 현상이 묘하게 흘러 부의 상속, 가난의 세습을 떠올리게까지 하는 것은 정말 의외이다.

척도(尺度)가 다른 인간의 지력(知力)과 재력(財力)이 AI에 의해 서로 호환되고 대체되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