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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과 가짜뉴스 고발한 에코의 마지막 소설

바람아님 2018. 11. 2. 07:57

(조선일보 2018.10.27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협박용 기사로 利權 챙기고 '무솔리니 처형 안 당했다'며
음모론 취재하던 伊기자 피살… 언론 일탈에 대한 유쾌한 풍자


제0호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이세욱 옮김|열린책들|336쪽|1만3800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새 신문 '도마니'('내일'이라는 뜻) 창간에 동참하게 된 대필 작가 겸 언론인

콜론나는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난 뒤 누군가 집에 침입했다고 의심한다.

전날 밤 물 한 모금과 함께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수돗물이 끊긴 것.

누가 들어와 수도관을 잠근 걸까. 비밀스러운 뉴스를 캐던 동료가 며칠 전 살해당한 사실이

생각나자 불안이 엄습한다. 그가 죽기 전 자신에게 무엇을 취재하고 있었는지 들려줬기 때문이다.

취재를 막기 위한 살인이었다면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도 무사할 수 없다.


신문 도마니의 창간 목적과 시험판 발행 방식이 수상하고 기이한 것도 그의 불안을 부추긴다.

주필 시메이는 데스크로 영입한 콜론나에게 "신문이 실제로 창간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함께 입사한 기자 6명에겐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

기자들은 자신이 채용된 진짜 목적도 모른 채 12회에 걸친 '제0호'(Numero Zero: '창간 시험호'란 뜻) 제작에 뛰어든다.


창간되지 않을 신문을 만드는 편집국에서 빚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이 소설은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쓴 일곱 번째이자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에코는 이 장편에서 '푸코의 진자'를 통해 제기했던 '음모론에 휘둘리는 군중'이라는 묵직한 테마를 다루면서도

특유의 지적인 오락 서사를 동원해 경쾌한 이야기로 버무려 냈다. 소설은 음모론 확산의 온상으로 언론을 지목하고,

진실 아닌 특정인의 이익에 복무하는 언론의 일그러진 행태도 함께 비판한다.


에코는 별세 한 해 전 발표한 마지막 장편에서 금권과 음모론에 휘둘리는 이탈리아 언론 실태를 풍자하며 “강한 경영진이 신문사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에코는 별세 한 해 전 발표한 마지막 장편에서 금권과 음모론에 휘둘리는 이탈리아 언론 실태를 풍자하며

강한 경영진이 신문사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작가 성지연


이미 여러 매체와 기업체를 경영해 온 비메르카테의 진짜 목적은 '신문을 창간하는 척'하는 것이다.

사회 지도층의 약점을 취재해 시험호에 실은 뒤 이를 자신이 금융계 이너서클에 들어가기 위한 협박 수단으로 쓸 생각이다.

당연히 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뉴스는 배제된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 1992년 밀라노인 이유는 분명하다.

비메르카테에게서 밀라노 출신 정치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를 떠올리게 한 것.

1992년 2월 이탈리아 사회당 밀라노 지부에서 발생한 금품 수수 사건이 폭로되고 그해 전국적으로 1000명 넘는

정치인·고위 공직자가 체포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며 이탈리아 제1 공화정이 무너졌다.

베를루스코니는 제2 공화정 성립 과정에서 자신이 소유한 기업의 자금력과 언론의 영향력을 동원해 정권을 장악했는데,

작가는 이를 도마니 편집국의 각종 일탈에 빗대어 풍자한다.


에코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음모론의 영향을 받아 사실을 의심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가짜는 나를 매혹한다"

말로 음모론의 독한 흡입력을 경계했다.

소설은 브라가도초의 취재를 따라가며 인간 영혼을 꼼짝 못하게 포박하는 음모론의 위력을 그린다.

브라가도초는 무솔리니가 처형당하지 않았으며, 2차대전 때 밀라노의 한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시신은 그의 대역이라고

확신한다. 진짜 무솔리니는 연합국이 빼돌려 교황청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탈출시켰다며 다양한 증거를 동원한다.

사람들이 대역의 정체를 못 알아본 것은 현장의 분노한 시민들이 시신의 얼굴을 무참히 훼손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평소 위궤양을 앓았는데 1945년 4월 30일 실시한 부검에선 질병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제시한다.

연합국이 그를 살려둔 이유는 훗날 이탈리아가 공산화될 경우 그에 맞설 인물로 내세우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1970년 12월로 계획됐던 우파 쿠데타 모의가 흐지부지된 것은 공교롭게도 거사 직전 무솔리니가 늙어 죽었기 때문이란

가정을 들이민다. 브라가도초는 알도 모로 전 총리 납치 암살, 밀라노 경찰서 폭탄 테러,

교황 요한 바오로1세의 급서(急逝) 등 이탈리아 현대사를 피로 얼룩지게 한 모든 폭력과 수상한 죽음이 극좌파에

죄를 덮어씌우려는 우파의 음모라고 의심하며, 콜론나에게 "이 정도면 척척 맞아떨어지는 얘기 아니야?"라고 외친다.

그는 더 나아가 이탈리아 현대사를

'CIA, 나토, 마피아, 정보기관, 군 수뇌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나쁜 일들을 꾸민 시절'로 규정한다.


브라가도초는 흉기에 등을 찔려 죽는 방식으로 퇴장한다. 에코가 음모론자들에게 내리는 철퇴다.

온갖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횡행하는 이 땅의 독자들에게도 각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광우병·천안함·세월호 괴담 유포에 앞장서거나 동조한 언론,

사드가 배치된 성주에 달려가 "전자파에 온몸이 튀겨져 죽을 것"이라며 춤을 춰 댄 국회의원들은

이 땅의 브라가도초들이며, 괴담에 동조한 이들은 자기 집에 암살자가 들어왔다며 공포에 떤 콜론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