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사회원로 초청 간담회에서 밝힌 ‘선 적폐청산 후 협치’ 취지의 발언을 전해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이날 원로들은 “극한 대결을 대통령이 직접 풀어 달라”(윤여준)고 건의했고, “싸우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고 국민의 뜻을 모으라”(이홍구)고 주문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분열에서 통합으로 이끄는 것”(김명자)이라는 조언도 나왔다. 좌우 성향을 막론하고 국민통합과 협치를 당부한 셈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적폐) 청산이 이뤄진 다음, 협치하고 타협도 할 수 있다”면서 “살아 움직이는 적폐 수사를 정부가 통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일말의 기대감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마치 ‘적폐 수사’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뤄지는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과연 그럴까. 공관병 갑질 의혹 사건의 박찬주 전 육군 대장. 문 대통령은 일찌감치 그를 적폐로 몰아붙였다. 2017년 8월 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통령은 “군과 사회 전반에 걸친 갑질 문화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직후 박 전 대장의 전역 신청은 거부됐고 국방부 지하 영창에 석 달 이상 구금됐다. 최근 그는 공관병 갑질 의혹 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기무사 계엄문건 작성 의혹이 불거졌을 때도 문 대통령은 “구시대적이고 불법적인 일탈 행위”(2018년 7월 2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라고 규정했다. 여권은 ‘내란 예비 음모’라고 거들었다. 하지만 수사 결과는 관련자 3명을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게 전부였다. 김학의·장자연 사건은 지난 3월 18일 검·경을 향해 “조직의 명운을 걸고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규명하라”고 한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재수사에 돌입하게 된 경우다. 하지만 장자연 사건은 관변 언론이 주요 증인으로 내세웠던 윤지오가 모욕·사기 등 혐의로 피소되고 캐나다로 떠나버린 뒤 원점 회귀했다. 김학의 사건 재수사는 애초부터 ‘황교안 잡으려’ 기획됐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과녁을 빗나간 굵직한 적폐 몰이, 이념과 주의주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사지로 내모는 청산 작업이 대부분 문 대통령의 혀끝에서 시작됐다. 살아 움직이는 적폐 수사를 통제할 수 없다면서 ‘선 적폐청산 후 협치’ 운운하는 건 유체이탈 화법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수사반장이고 청와대가 수사본부”라고 말했다. 이언주 무소속 의원은 “취임 2년 동안 문 대통령이 한 일은 대한민국을 ‘내전에 가까운 갈등과 증오의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흘 뒤면 문 대통령 취임 2주년을 맞는다. 취임사에서 대통령은 국민통합과 관련해 세 가지를 약속했다. 야당을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 삼겠다고 했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분도 진심으로 섬기겠다고 했고,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고 했다. 모두 거짓이었다. 집권 2년간 야당과의 협치는 없었고, 국민을 촛불과 적폐로 양분했고, 온 나라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무한투쟁으로 몰고 갔다. 국민은 이 정권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반대쪽에 섰던 사람들이 줄줄이 적폐로 몰려 탈탈 털리고 감옥에 갇히고 때론 자살로 내몰리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지 모른다. 임기가 3년이나 더 남았다니 앞이 캄캄해진다.
mi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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