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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하면서도 절제된…무의식의 세계 '랄프 깁슨' 사진전

바람아님 2014. 8. 13. 22:30

에로틱하면서도 절제된…무의식의 세계 '랄프 깁슨' 사진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8.13 00:15

 

 

 

 

 

 

 

 

 


20세기 현대사진의 중요한 맥을 잇는 사진예술계 거장 랄프 깁슨(75)의 사진전이 한국을 찾는다.

랄프 깁슨은 흔히 20세기 사진사에서 초현실주의 사진의 대가라 불린다. 그의 사진은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기이하고 낯선, 에로틱하면서도 절제된, 간결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깃털로 엉덩이를 간지럼 태우는 여인, 스르르 열리는 문 틈 사이 손, 바지 가랑이를 슬쩍 건드리는 여인의 발가락….

이러한 분위기는 논리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해 가능한 범주가 아니다. 마치 무의식 깊숙이 숨겨져 있는 불온한 욕망 혹은 꿈에서 찾아낸 파편화된 기억을 재배치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랄프 깁슨은 특히 1970년대에 발표한 ‘몽유병자(The Somnambulist)’ ‘데자뷰(Deja vu)’ ‘바다의 날들(Days at Sea)’ 등의 시리즈로 초현실주의 사진에 정점을 찍었다. 현실의 재현을 기반으로 한 기하학적 구성과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당시 진 손튼과 같은 사진평론가들은 “새로운 감각의 세계는 랄프 깁슨의 사진을 통해 열린다”고 표현했다.

랄프 깁슨은 17세 때 해군 사진병으로 근무하면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해 도로시아 랭, 로버트 프랭크 등 세계적인 사진가들의 조수 생활을 통해 사진을 배우고 익혔다. 그는 사실을 전달하는 다큐멘터리식 화법을 탈피해 일상, 꿈, 욕망과 같은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대담하게 표현했다.

특히 강렬한 흑백의 대비, 과감한 구도와 클로즈업, 독특한 앵글과 파격적인 프레임 구성 등 그의 전매특허다.

그의 독특한 사진 스타일은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80여 점의 빈티지 프린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초창기 사진부터 2000년대까지 랄프 깁슨의 대표작을 총망라했다.

랄프 깁슨 사진전을 직접 기획한 고은사진미술관의 이상일 관장은 " 개념이 트렌드가 된 동시대 예술에서 논리가 아닌 감각과 감성, 즉 ‘필링(feeling)’의 중요성을 랄프 깁슨의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가볍게 범람하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속에서 아날로그의 장인적인 요소를 이번 사진전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논리가 아닌 감각을 통해 무의식 세계의 중요한 가치를 느껴볼 기회”라고 전시를 소개했다.

▶ 랄프 깁슨 사진전. 8월 12일부터 11월 19일까지.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051-746-0055.


고은사진미술관 해외교류전
Ralph Gibson 랄프 깁슨
2014년 8월 12일 – 2014년 11월 19일

    


ⓒ Ralph Gibson_Untitled, Gelatin Silver Print, 40.6×50.8cm, 1970

고은사진미술관은 프랑스의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과 독일 현대사진에 이은 세 번째 해외교류전으로 초현실주의 사진의 거장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랄프 깁슨은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와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으로부터 시작된 20세기 현대사진의 맥락을 잇는 중요한 작가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한 미국의 대표적인 사진가이다. 현대사진의 특징은 사건이나 의미를 전달하고 사실을 기록하는 전통적인 사진의 규범에서 벗어나, 사진을 하나의 “감각”으로 규정하고,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매체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는 데 있다. 랄프 깁슨 역시 단순히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매체가 아닌, 이러한 재현을 통해 발산되는 자신의 내적인 느낌과 상상 혹은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사진을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꿈이나 욕망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감각화하기 위해 구도를 최대한 단순화하여 건축적인 공간을 구성했다.

1970년대에 발표한 작품집 『몽유병자The Somnambulist』, 『데자뷰Deja vu』, 『바다의 날들Days at Sea』을 시작으로 랄프 깁슨은 사진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연다. 그가 보여주는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벗어나거나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한 일종의 “환기”로서의 재현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실의 또 다른 반영이자 무의식인 꿈의 세계를 긴장감 넘치는 프레임으로 포착하고 일상 속에서 내재된 미묘한 분위기나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자신이 구축한 프레임을 통해 드러낸다. 이는 사진적 테크닉으로 현실을 전도시켜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다른 초현실주의 사진가들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특징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초현실적 구성 즉, 현실을 포착하되 그것을 기하학적 구성과 절묘한 균형을 통해 부분적 혹은 단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일상성을 벗어난 프레임에서 초현실적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랄프 깁슨에게 부분은 전체가 보여주지 않는 혹은 드러내지 못하는 또 다른 총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인 셈이다.

어디서 본 듯하지만 기이하고 낯선, 파격적이면서도 엄격한, 간결하면서도 몽환적인 그의 사진은 그의 말처럼 하나의 “사진적 데자뷰”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기묘하고 낯선 느낌은 그가 포착한 사물 혹은 대상의 질서를 사진으로 재배치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효과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파격적인 대비가 미니멀리즘의 간결함 및 기하학적 추상과 만나 우리에게 대상에 대한 뜻하지 않은 지각방식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의 사진이 우리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시각화” 때문이다.

이번 고은사진미술관의 《Ralph Gibson 랄프 깁슨》전은 랄프 깁슨의 1960년대 초창기 작업에서부터 2000년대까지의 흑백 작업 중에서 특별히 엄선한 그의 대표작 80여점을 빈티지 프린트로 선보인다. 이 전시는 스트레이트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초현실주의, 강렬한 흑백대비, 과감한 구도와 클로즈업, 독특한 앵글과 파격적인 프레임 구성 그리고 공간과 빛의 절묘한 활용 등 랄프 깁슨의 사진적 특징을 총체적으로 조망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아울러 유럽 중심의 사진으로부터 미국 사진의 전성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직접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사진 매체의 독자성과 특수성에 충실하고자 한 모더니즘의 경향을 넘어서서, 부분과 단편을 통해 일상의 순간성을 드러내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향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정(고은사진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