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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일본인 틈 속 당당히 한복 입고.. 해외공연서 "나는 조선인"

바람아님 2016. 11. 27. 00:04
세계일보 2016.11.25 21:05

〈2〉 나는 재패니스 아닌 '코리언 댄서'
조세니스(chosenese)’란 말을 아는가. 요즘은 아마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웬만한 영어사전을 찾아도 나오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최근에 입수한 최승희의 1930~40년대 관련 자료를 살펴보다 뜻밖의 단어를 발견하게 됐다. 그 안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최승희·안막 부부가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성 3명과 어울려 조촐한 파티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1938년 1월 미국으로 향하는 일본의 치치부마루(秩父丸) 선실 안에서였다. 최승희를 가리켜 ‘조세니스 무용가(dancer)’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세니스’는 조선인이란 뜻이다. 최승희는 이 배를 타고 요코하마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까지 ‘태평양 횡단 항해’를 하던 중이었다.

최승희는 1938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 카란극장에서 꿈에 그리던 생애 첫 미국 공연의 막을 올린다. 이 역사적인 공연을 위해 최승희가 일본을 떠난 것은 1937년 12월 29일이었다.

치치부마루는 1만6000t급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우편선을 겸한 가장 큰 상선(商船)이었다. 따라서 이 배 승객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여인들의 복장도 전형적인 왜색풍이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남편 안막마저 일본식 간편복인 유카타(浴衣)를 걸치고 있다.


1938년 1월 미국으로 향하는 일본 상선 치치부마루 선실 모임에서 최승희가 하얀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의 한복 차림을 하고 있다. 최승희는 일본인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한복을
입을 만큼 조선인임을 잊은 적이 없다.


사진 속에서 최승희의 의상을 주목했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를 두른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다. 최승희는 일본인 틈바구니 속에서 당당하게 한복을 입고 조선 여인의 고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영문으로 된 사진 설명은 아마도 최승희 부부가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면 ‘조세니스’가 아니라 재패니스(japanese)로 소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아는 최승희는 이처럼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최승희의 이런 강렬한 민족의식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27년 2월 8일 일본 다이쇼(大正) 일왕 장례식 때 일이다. 장지로 향하는 장례열차가 이시이무용연구소가 있는 무사시사카이(武蔵境) 지역을 지나갔다. 연구생들은 모두 열차가 보이자 꿇어앉아 묵도를 올리는 예를 표했다. 그 순간 최승희는 뒤돌아서 등을 지고 섰다. 나중에 스승 이시이 바쿠가 그 이유를 물었다.

“저는 도저히 일왕에게 절할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최승희가 1926년 4월 연구소에 입소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6살 소녀 시절의 일이다. 이시이 바쿠의 부인 야에코(八重子)는 50여년이 훌쩍 넘은 1981년에 쓴 글에서 당시 기억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승희의 대답을 들은 이시이가 돌아서며 눈물을 훔치는 것을 얼핏 본 나도 몹시 가슴이 아팠다. 어린 나이였지만 평상시에도 상당히 강한 민족정신을 가진 아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이를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증거가 유럽 순회공연을 할 때도 발견된다. 최승희는 1939년 1월부터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유럽 전역을 누비며 공연을 펼쳤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각종 매체에서는 최승희를 ‘한국의 무용가(danses coreennes)’라거나 ‘한국(la Coree)에서 왔다’고 보도하고 있다. 네덜란드 공연 때도 현지 신문은 최승희를 ‘재능을 타고난’이란 수식어와 함께 ‘한국의 여성무용가(koreaansche danceres)’로 소개했다. 이는 최승희가 자신의 유럽 공연을 홍보하는 팸플릿에서 일관되게 ‘코리안 댄서’임을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1938년 미국 뉴욕에서 최승희가 ‘화랑의 춤’을 추고 있다.

최승희로서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앞서 말한 1938년 미국 순회공연 중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월 로스앤젤레스 공연 때 재미교포들을 중심으로 반일(反日)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때로는 최승희가 공연 중인 극장 앞에서 반일 배지를 판매하기도 했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은 주미 일본대사관의 주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미국에서 이런 종류의 공연은 일본 정부를 통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최승희의 현지 일본영사관 출입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일미 친선의 밤’과 같은 행사 참가 등을 거절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를 근거로 재미교포들은 최승희의 미국 공연을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정치적 목적의 행사라고 비난했다. 재미교포들이 미국 내 반일 여론을 조성하는 호기로 활용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그해 2월에 두 차례 열린 뉴욕 공연까지 이어졌다. 재미교포들의 방해로 공연이 도중에 몇 차례 중단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토록 고대했던 미국 공연이 엉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최승희로서는 이에 대해 심한 속앓이를 했을 뿐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같은 조선인으로서 재미교포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럽 순회공연 중에 ‘코리언’임을 굳이 강조한 것은 이를 의식한 것이었다.


1938년 미국 뉴욕에서 최승희가 궁중무용 검무를 초연하고 있다.

훗날 최승희는 제자이자 동서인 김백봉에게 당시를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네 조국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니? 나는 외국 공연을 다니면서 내 조국이 없다는 것에 대해 비참함을 느꼈다.” 김백봉은 최승희의 그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자주 되뇌인다. 이후 유럽, 남미 순회공연을 갔을 때에도 일본여권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최승희는 많이 괴로워했다고 김백봉은 증언하고 있다.

이를 빌미로 일본과 일본인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최승희가 배일(排日)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심이 그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승희는 ‘근거 없는 악소문’이라거나 ‘누명’이라는 식으로 일본인들에게 항변하면서 무마를 시도했다. 그해 7월 최승희는 일본인 후원자 중 한 명인 후루사와 다케오(古澤武夫)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번에 이 편지 원문을 입수해 살펴보게 되었다. 식민지 백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복잡한 심경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그 편지 속에서 최승희는 “내가 반도 출신으로 특수한 입장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와 같은 거짓 소문이 그럴듯하게 전해지는 것”이라고 속내를 토로하고 있다.


최승희는 미국, 유럽, 남미 등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1940년 12월 일본으로 돌아온다. 이후 일본에서 최승희는 일본 궁성과 야스쿠니신사 등을 방문하고,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한때 배일활동 혐의를 받았던 최승희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1944년 7월 최승희가 중국에서 일본군 위문공연을 하기 전의 모습. 배일인사로 몰린
최승희는 생존을 위해 친일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국내에서 친일파로 낙인찍히는 결정타는 일제 말기 일련의 일본군 위문공연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이른바 ‘국민총동원령’을 내린다. 이미 ‘세계적 무용가’의 반열에 올라 있던 최승희는 일제의 군 위문공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군 위문공연 도중에 최승희는 동행한 제자 김백봉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승희는 해방 후인 1946년 5월 29일 고향인 서울로 돌아왔다. 남편 안막이 평양행을 선택한 것과는 다른 길이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친일파를 단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상징적인 반민특위부터 용두사미 꼴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해방의 그 순간까지 최승희의 배일 가능성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랬기에 억울하게 여기는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최승희는 사과 한마디 없이 면죄부를 받은 다른 수많은 친일파 인사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공개적인 사과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속죄의 길은 앞으로 최승희 개인의 무용을 지양하고 코리안 발레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다짐도 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하지만 최승희를 향한 단죄의 목소리는 남한에서 유난히 큰 편이었다. 일종의 유명세랄 수도 있었다. 이를 포함해 복합적인 이유로 최승희는 결국 1946년 7월 20일 남편이 있는 북한으로 향한다. 내가 보기에 최승희의 월북은 우리 민족에게 큰 손실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는 배일 혐의자로, 해방 후 남한에서는 친일파로, 북한에서는 반동으로 몰려 결과적으로 아무데서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셈이 됐다. 최승희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 여지는 없었을까 하고 지금에 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최승희 같은 세계적 예술가를 만나기란 역사적으로 정말 드문 기회이기 때문이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