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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시위 주역 “中 얼마나 통제했으면, 젊은이들 천안문 사태 모른다”

바람아님 2024. 6. 5. 06:26

조선일보  2024. 6. 5. 01:01

수배 대상 5위 저우펑쒀, 미 청문회 증언
‘白紙 시위’ 참가 대학생도 얼굴 가리고 참가
미 의회 ‘인권’ 고리로 중국 압박

“1989년 6월 천안문 광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위를 벌였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탱크가 밀려 들어올 때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난 사람도 저였습니다.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중국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중국의 천안문 사태 35주기를 맞은 6월 4일 오전, 미국 연방하원 의원회관인 워싱턴DC 레이번 빌딩에서 천안문 시위 주역 중 한 명인 저우펑쒀(周鋒鎖·56)씨가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미 의회의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CECC)’는 이날 저우펑쒀 등 중국 공산당의 인권 유린에 반대하는 중국 출신 인사들을 초청해 청문회를 열었다.

천안문 사태는 중국 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 탄압에 반대했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가 1989년 4월 사망한 뒤 추모 집회가 확산하면서 촉발됐다.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군을 동원해 진압했고 이 과정에 대규모의 희생자가 나왔다.

당시 베이징 칭화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저우씨는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집중 추적을 받았다고 이날 밝혔다. 그는 공산당의 수배 대상 상위 5위에 들었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현재 미국의 인권 단체 ‘차이나 휴먼라이츠’의 상임이사인 저우씨는 이날 “중국 공산당은 내부 검열과 잔인한 탄압을 통해 학살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선택했다”며 “언론 자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일어난 일의 실체에 대한 언급을 금지해 오늘날 중국의 많은 젊은이는 (당시 상황을)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라고 했다.

천안문 사태 다음 날인 1989년 6월 5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를 몰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섰을 때 한 남성이 맨몸으로 가로막았던 일을 언급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탱크맨’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외신 기자들이 이 장면을 촬영했고,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탱크맨은 지금도 공산당의 탄압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https://v.daum.net/v/20240605010136233
천안문 시위 주역 “中 얼마나 통제했으면, 젊은이들 천안문 사태 모른다”

 

천안문 시위 주역 “中 얼마나 통제했으면, 젊은이들 천안문 사태 모른다”

“1989년 6월 천안문 광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위를 벌였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탱크가 밀려 들어올 때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난 사람도 저였습니다.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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