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강천석 칼럼] 公約보다 나라 상황에 정직해야

바람아님 2014. 11. 9. 17:35

(출처-조선일보 2014.11.07 강천석 논설고문)

정치에선 無能이 가장 큰 惡德… 독일 불황,슈뢰더와 메르켈 대응 돌아보라

강천석 논설고문 사진

요즘 겁(怯) 많은 사람은 아침 눈뜨기가 두렵다. 

빚덩이가 굴러 내려왔다 하면 최소 조(兆) 단위다. 

어제 아침 굴러 내려온 무상(無償) 보육 문제는 2조원이 넘는 무게라고 한다. 

무상급식·무상 고교 교육·기초연금·건강보험·의료급여 등등 '복지'라는 단어가 붙은 분야 적자는 

수조원은 예사이고 웬만큼 났다 하면 수십조원을 훌쩍 넘는다. 

며칠 전 국무총리는 '공무원연금제도를 이대로 둘 경우 앞으로 20년간 200조원의 재정 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빚과 적자에 가속(加速)이 붙은 모양이다. 

어디 하나에라도 정통 부딪치면 나라가 온전치 못할 것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있다. 

2000여년 전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살림이 쪼들리자 기르던 원숭이들과 협상을 벌였다. 

하루 여남은 개 주던 도토리를 줄일 심산으로 '이제부터 도토리를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그럼 배가 너무 고프다'며 아우성을 쳤다. 

그러던 원숭이들이 "아침 네 개, 저녁 세 개는 어떠냐"는 수정(修正)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득에 휘둘리는 어리석음'과 '어리숙한 상대를 돌려먹는 잔꾀 수법'을 나무랄 때 끌어오는 

이야기다.

2011년 대한민국에 똑같은 무대가 설치됐다. 배역(配役)만 달라졌다. 

잔꾀에 능(能)한 주인 역할은 여야 정당과 대통령 후보들이, 도토리를 '세 개는 뱉고 네 개는 삼키는' 역할은 투표권을 가진 

만 19세 이상의 유권자가 맡았다. 

그해 민주당은 '3무(無)+반값' 정책으로 민심(民心)을 공략했다. 

'급식 무상(無償)' '보육 무상' '의료 무상'에다 '반값 등록금'을 얹었다. 

공약 실천에 드는 예산은 192조원으로 어림됐다. 새누리당은 민주당 공약이 너무 헤퍼 실현성이 없다면서 97조원짜리 

'알짜 선물 세트'를 내놓았다. 0~5세 무상 보육과 기초연금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양쪽 모두 본격적 증세(增稅)가 아닌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예산 조정만으로 공약 실천이 너끈하다고 했다. 

192조원이 들든 97조원이 들든 그 돈이 나올 곳은 국민 지갑밖에 없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국민들이 그런 공약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시늉을 했다. 

바윗덩이는 이때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국민도 정치인들에게 도덕 교사 역할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정치가 정직하지 않다는 것이 결정적 허물은 아니다. 

나라가 어려운 이유를 현명하지 않은 국민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나라 재정이 어려울 텐데…'라며 복지를 마다했다는 현명한 국민 이야기는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없다. 

정치인더러 정직해지라고, 국민보고 현명해지라고 주문하는 것은 약(藥)이 못 된다는 말이다.

정치 세계에서 가장 큰 악덕(惡德)은 부정직이 아니라 무능(無能)이다. 

무능한 정치인의 정직은 나라를 빼도 박도 못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다.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약속하는 게 정직이다. 

해선 안 될 공약에 끌려다니는 건 무능이다.

슈뢰더 독일 총리(1998~2005년 재임)는 선거 공약이 아니라 나라의 상황에 정직하게 대처했다. 

2003년 10월 독일의 여당이었던 사회민주당 당사는 수천명의 성난 시위대에 포위됐다. 

시위대의 주력(主力)은 사회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노조원들이었다. 

그들은 '배신자 슈뢰더'라는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슈뢰더가 발표한 '독일 경제 재생 계획'이 도화선(導火線)이 됐다. 

재생 계획의 골자는 '실업수당 지급 기간은 32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 '건강보험 대상 축소' '은퇴자 연금 동결(凍結)' 

'노인 양로 보험 개인 부담 2배 인상'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사회민주당 지지 세력의 화를 돋우고 지지 기반을 갉아먹는 내용이었다. 

슈뢰더의 결심을 재촉한 것은 해마다 100억달러(10조원)씩 쌓여가는 연금 적자였다. 

불황과 그에 따른 세수(稅收) 감소는 상황을 더 다급하게 몰아갔다. 

이대로 가면 경제의 서까래가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지붕이 내려앉을 것이라는 게 그때 슈뢰더 판단이었다. 

여론 전문가 예상대로 경제 재생 계획 발표 이후 슈뢰더 지지율은 22%나 곤두박질쳤다. 

사회민주당은 지지층의 심기(心氣)를 거스른 개혁 탓에 다음 총선에서 정권을 잃었고 독일 경제는 개혁 덕분에 살아났다.

당시 야당 당수가 지금 메르켈 총리다. 

메르켈은 지지가 급락(急落)한 슈뢰더 정권은 일격(一擊)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당내 유혹을 뿌리치고 경제 개혁 조처에 

지지를 보냈다.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하는 정책을 야당이 지지하고 나서는 데는 쉽지 않은 결심이 필요했다. 

메르켈의 장기 집권은 그 결심에 대한 이익 배당(配當)의 성격도 있다.

우리 국민들은 아침마다 빚덩이 굴러오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깬다. 

한국 정치, 한국 경제가 그때의 슈뢰더와 메르켈 같은 여야의 리더십을 기다린다면 분수 넘친 호사(豪奢)를 바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