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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② 말 - 2

바람아님 2015. 6. 26. 11:34

(출처- 주간조선 2009.11.16)

말의 원래 고향은 아메리카 대륙
1만년 만에 귀환, 원주민 정복 선봉에

:: 말의 활약

전쟁의 주역… 칭기즈칸의 승리도 말의 승리

이슬람교의 팽창에서도 말은 핵심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가 성립되고 난 후 단기간에 유라시아의 광대한 지역과 
아프리카 북부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데는 이 팽창이 단지 종교적 전도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군사적 정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무하마드 자신이 탁월한 기병대 장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무하마드가 거느린 말에 관한 전설이 빠질 리가 없다. 어느 날 무하마드는 자신이 거느리는 말들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물을 주지 않고 가둬두었다가 마침내 문을 열자 모든 말들이 일제히 급수대로 
달려갔다. 바로 그 순간, 무하마드가 전투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 가운데 다섯 마리가 곧바로 달려왔다. 
이 말들이 무하마드가 애용한 말들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아라비아의 왕실 말이 되었다고 한다. 무하마드가 
‘바람에서 탄생한 존재’라고 일컬은 아랍 말은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 각국이 소유하고 싶은 명마의 대명사였다.

▲ 쿠샨 왕조 신화에 등장하는 말과 등자를 묘사한 조각.
(서기 150년경 추정)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제국이라 일컬어지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역시 기병의 승리를 통해 
이룩한 것이다. 
몽골 기병들은 한번 말에 타면 며칠 동안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말과 한 몸이 되었으니, 
거의 켄타우로스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말이 풀이나 건초를 먹는 동안에도 그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안장에서 쉬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식량이 떨어졌을 때 자기가 타고 다니는 말의 혈관에 구멍을 뚫고 피를 빨아먹으며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말이 살신성인의 
공헌을 한 것은 정복 전쟁 때만이 아니라 제국 건설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전역에 약 20㎞마다 역참을 두어서 모두 
1만곳의 역참이 있었는데, 한 곳마다 400마리의 
말을 보유하되 그중 절반인 200마리는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몽골은 그야말로 말의 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상 전투에서 말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사례 중 하나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이다. 콜럼버스 이후 자기 
원산지로 되돌아온 말들은 가공할 정복자로서 귀향한 셈이다. 말을 처음 본 인디오들에게 그것은 지옥에서 온 괴물처럼 
보인 모양이다. 잉카제국 점령 당시의 기록을 보면 어이없어 보일 정도로 쉽게 제국이 무너지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말이 있다. 1532년에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도착한 피사로의 군대는 고작 106명의 보병과 62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소규모 부대가 7000명을 살해하고 잉카(황제) 자신을 생포함으로써 8만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는 
제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전략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병사들이 나팔을 불고 말에 딸랑이를 매달아 소리를 
 내면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말의 괴력 앞에 인디오들이 혼비백산한 것이 승패를 가른 요인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 말의 변신

2차대전부터 탱크·자동차에 밀려 레저용으로  
▲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가 카데시전투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

이처럼 세계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도대체 말은 언제까지 사람들 간의 무력 충돌에 동원되었을까? 우리가 통상 짐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늦은 시기까지 말이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가 말 문화의 정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때는 철마(鐵馬·기차)가 등장한 
시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수의 살아있는 말이 수송과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866년에 일어난 보오전쟁(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 당시 5만6000명의 기병이 
창과 칼로 무장하고 총을 든 병사들과 대적한 적이 있었고, 몇 년 뒤 보불전쟁(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 1870~1871)에서도 9만6000명의 기병이 전투에 임하였다. 
이런 현상은 1차대전까지 지속되어서, 1914년에만 해도 기병대 간의 교전이 상당히 자주 
일어났고 특히 정찰 활동에 말이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다만 서부전선에서는 참호전이 
일반화되고 철조망과 기관총이 널리 사용되면서 말은 급격히 전투에서 배제되었다.

그렇지만 참호전이 확립되지 않은 동부전선에서는 여전히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당시는 러시아군에 20만명의 
기병이 있던 때이다. 전선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특히 무기와 보급품의 수송에서는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철도는 적의 폭격으로 끊어지지만, 말은 길이 없는 곳까지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1916년에 전투에 
동원된 말의 수가 120만마리로 추정되는 형편이니, 이때만 하더라도 말 사료가 핵심 군수물자로 취급되었다. 
말이 전쟁에서 중추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것은 2차대전에 가서의 일이다. 탱크와 자동차가 말의 역할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제 비로소 말은 사람들 간의 싸움에서 놓여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단지 의장대나 왕실을 지키는 부대 같은 곳에서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실제적인 군사적 효용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군사 부문만이 아니라 수송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2차대전 직후에도 유럽에서는 당분간 
말이 운송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1948년 프랑스에는 말 200만마리가 있었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곧 자동차로 
대체되었다. 이제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문에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레저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 외에도 말을 이용한 치료(equitherapy)와 같은 새로운 분야도 개발되고 있다. 신체 장애아나 자폐아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치면 몸의 균형을 찾고 외부에 마음을 열도록 하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말은 역사의 흐름 내내 남성적·전투적·귀족적인 성격을 띠며 인간과 함께 해 왔지만, 이제는 훨씬 민주화되고 또 여성과 
아동에게 친화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 주경철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