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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③-1 비버

바람아님 2015. 6. 28. 20:24

(출처-조선일보 2009.11.30)


[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③ 비버
명품 모피의 주인 비버, 북아메리카 역사를 바꿨다




예로부터 비버(beaver)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이솝 우화를 보면 비버가 사냥개들에게 쫓겨 구석에 몰려서 더 이상 도망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고환을 물어뜯어 사냥꾼들에게 던져준다. 비버의 고환은 독을 제거하고 생리불순에 좋으며 순산을 돕는 약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냥하는 것이 그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비버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그런 희생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같은 권위 있는 책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고대
유럽 사람들은 위험에 처한 비버가 스스로 거세를 한다는 이 이상한 전설을 실제로 

믿었던 것 같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며 비버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약재로 쓰이는 부분도 고환이 아니라 다른 부위이다. 
그러나 어쨌든 도덕론자들은 이 이야기를 즐겨 인용했다. 비버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진해서 돈을 내놓는 현명한 부자들, 또는 음탕함을 스스로 억제하는 진지한 
수도사들의 비유로 쓰였다.

유럽에 이런 이야기가 떠돈 데에는 비버를 가리키는 단어들과도 관련이 있다. 
인도유럽어에서 비버를 가리키는 말의 어간(語幹)은 bhe로서 이는 갈색(brown)을 가리킨다.(곰을 가리키는 단어 bear도
여기에서 나왔다.) beaver, biber, bobre, vebra, vibre 등 비버를 나타내는 유럽 각국의 말들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비버를 가리키는 다른 계열의 단어들이 있으니, 히브리어에서 기원하여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거쳐 프랑스어로
들어간 castor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연히도 ‘거세(castration)’라는 단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비버의 
생살을 찢는(!) 자기희생의 전설이 나온 데에는 비버의 영특한 성질과 함께 이런 특이한 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비버가 살기 위해서는 잔잔한 물과 이빨로 껍질을 갉을 수 있는 나무가 있어야 한다. 
비버는 물 가운데에 직경 2~6m의 집을 짓는데, 주요 출입구는 반드시 물속으로만 통해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지만,
포식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도망갈 수 있도록 몇 개의 출구를 따로 준비해 놓는다. 그리고 가뭄 때 집이 물 밖으로 드러
나거나 홍수 때 완전히 침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돌, 나뭇가지, 풀, 흙덩어리로 탄탄한 댐을 짓는다.
 

▲ 비버 서식지 개념도 / 강의 비버 서식지. 비버는 나뭇가지를 물어다 댐을 쌓는다.
:: 고기·모피·향수… 버릴 것 없는 사냥감 

비버는 쓸모가 많은 짐승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냥꾼의 목표물이 되었다. 

우선 고기는 식용으로 쓰이는 데다가, 아주 튼튼하고 따뜻한 솜털이 나 있는 가죽으로는 좋은 모피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거기에다가 해리향(castreum)이라는 귀한 물질도 얻는다. 이는 원래 비버가 봄에 짝짓기를 할 때 상대를 유인하기 위해 

분비하는 아주 강한 향을 가진 물질인데 유럽에서는 고급 향수의 재료나 약재로 쓰였다. 이런 이유로 비버를 많이 사냥한
것이 비버 개체수 감소의 한 요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비버가 급격히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인구 증가로 인한 자연환경의 변화라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10~11세기 이후 유럽 인구가 늘면서 숲이 사라져간 데다가
늪지·못·호수도 많이 메워져서 비버의 서식 환경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 결과 중세 말이 되면 서유럽에서는 더 이상
비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이제 비버를 잡을 수 있는 지역은 동유럽과 러시아밖에 없었다.
16세기 말에 러시아를 방문한 서구인 헤르베르슈타인(Herberstein)이 “이 지역 사람들 거의 모두가 비버 가죽 옷을 입고
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때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비버를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만간 이곳에서도 남획으로 인해 비버의 수가 급감했다.  결국 동쪽 먼 지역으로 비버를 찾으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 1635년 블라우가 그린 미국 허드슨강 지도. 비버 등 모피 동물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외교관이자 작가인 카스텔리오네(1478~1529) 초상화. 
그림 속 그의 옷과 모자는 모두 비버 모피로 만든 것이다.
::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이유도 비버 사냥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지배해 가는 긴 여정은 비버 사냥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흔히 1580년에 예르마크의 지휘
하에 540명의 코사크들이 쳐들어간 것을 시베리아 정복의 첫 시작이라고 본다. 이들은 1585~1586년에 토볼스크시를
세웠는데 이곳이 시베리아를 향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이후 러시아인들은 17세기 내내 동토의 땅 깊숙이 동진(東進)해
들어가서 야쿠트족을 비롯한 시베리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그들에게 모피(jassak)를 조공으로 바치도록 강요했다.
시베리아 정복의 최전선에 있는 모피 사냥꾼들은 갈 데까지 다 가서 18세기에는 급기야 베링해를 넘어 알래스카로 들어
갔고 다시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을 따라 남하해 갔다. 
그 반대 방향인 멕시코로부터 캐나다 쪽으로 북상하던 스페인 출신 가톨릭 선교사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러시아인 사냥꾼들과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근대 초에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비버 가죽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580년대부터 파리를 중심
으로 비버 가죽 모자가 대유행했다. 
왜 이때 그런 유행이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유행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변덕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솜털을 펠트(felt) 천으로 가공하는 기술은 14세기부터 발달해 있었지만 그 이후 수그러들었다가 16세기에 주로
파리의 모자 제조공들이 다시 이 기술을 살려내서 유행시켰고 곧 런던과 다른 도시들이 이를 따라했다. 비버의 털을 뽑아
모자를 만들고 남은 가죽으로는 무두장이들이 가방을 만들었다. 여기에다가 여성들이 팔뚝에 토시를 끼는 유행까지 생겨
났다. 한마디로 비버 가죽은 멋쟁이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 유럽선 멸종…모피 찾아 북아메리카로 

그런데 이미 서유럽에서는 비버를 보기 힘들게 되었는데 어디에서 그것을 구해 온단 말인가? 러시아에서는 시베리아에서
구해 온 귀한 모피를 대부분 국내 수요로 충당했으므로 수출할 여력은 없었다. 이때 가죽과 모피를 제공하는 새로운 공급
지로 떠오른 곳이 북아메리카였다. 유럽 비버와 캐나다 비버는 사실상 같은 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했다.
인디언들은 유럽 물품들을 받고 그 대가로 비버 가죽을 제공했다. 이런 거래를 시작한 사람들은 대구잡이 어부들이었다. 
뉴펀들랜드 근해는 대구가 풍부하게 잡히는 황금 어장이어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바스크족 어부들이 몰려들었다.
어부들은 육지에 덕장을 만들어서 생선을 건조시켰는데 그러는 동안 조개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해안가를 찾아온
인디언들과 만나게 되고 양측 간에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건네는 솥, 쇠도끼, 칼 같은 금속
제품이나 자잘한 장신구들 혹은 술에 매료되었고 이런 물품들을 얻기 위해 모피를 갖다 주었다. 그런데 어부들로서는
힘들게 조업을 하는 것보다 인디언과 교환하여 얻은 모피를 유럽에 가져가서 파는 것이 훨씬 수익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전적으로 모피 거래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프랑스인과 영국인 탐험가들은 모피를 찾아 북아메리카 내륙으로 점차 깊이 들어갔다.
시베리아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 역시 비버를
찾아 헤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유럽인들은 콜럼버스 이후 100년 이상이 지날 때까지도 여전히 북아메리카에서 금과 향신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 나는 후추나 계피를 캐나다처럼 추운 곳에서 찾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었고 이 지역이 금 산지도 아니
었다. 일부 프랑스 탐험가들이 번쩍거리는 돌덩어리를 발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애지중지 본국에 가져갔지만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값어치 없는 황동으로 판명나서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자 차라리 이 대륙을 관통하여 태평양으로 갈 수 있는 물길을 찾는 데에 주력했다. 오늘날 우리는 북아메리카를
동서로 관통하는 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당시 사람들은 무진 애를 쓰며 탐험을
하다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볼테르마저도 캐나다를 두고 ‘몇 평(坪)의 눈덩어리’에 불과한 쓸모없는 곳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북아메리카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 장소로 보였다. 그나마 유럽인들을 내륙으로 끌어들이고 정착을 유도한
첫 번째 계기가 다름 아닌 비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