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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② 말 - 1

바람아님 2015. 6. 17. 19:09
(출처-주간조선 2009.11.16 주경철)

[문화 |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② 말
말의 원래 고향은 아메리카 대륙
1만년 만에 귀환, 원주민 정복 선봉에

말이 전속력으로 달릴 때 네 발굽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을까?

이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던 문제이다. 
맨눈으로 보면 어느 순간 말의 네 다리가 전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통 알 수가 없다. 
어찌 보면 한가하기 그지없는 문제지만, 궁금증을 풀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이 꼭 있게 마련이다. 
19세기 말 미국의 거부(巨富)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정치가이며, 특히 스탠퍼드 대학 설립자로 유명한 
릴랜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가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2만5000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을 걸고 친구와 내기를 한 그는 
“네 다리가 동시에 떠 있다(unsupported transit)”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마침 그 시기에 등장한 사진기를 
이용하기로 하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에게 말이 달리는 모습을 찍도록 했다(1877~1878). 당시의 유리 원판 사진기는 
촬영 준비를 한 후 한 번밖에 찍지 못하는지라 마이브리지는 24대의 카메라를 동원해서 연속 촬영을 했다. 
결과는…. 말의 네 다리가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확실히 찍혀서 스탠퍼드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마이브리지의 촬영은 정지된 사진으로부터 ‘활동사진’으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영화 교과서에 자주 거론되곤 한다.

▲ photo 조선일보 DB

19세기에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말 사진을 찍은 
이 일화는 장구한 역사의 흐름에 주목하는 역사가의 
관점에서는 새삼 흥미로운 데가 있다. 
원래 말의 고향은 다름 아닌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말이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퍼져가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1만3000~4000년 전에 지구의 기온 하강으로 
해수면이 크게 내려가서 현재의 베링해협이 뭍으로 
드러남으로써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가 연결되었을 
때의 일이다. 지질학자들이 베링기아(Beringia)라 
부르는 이 땅은 남북 간 폭이 약 800㎞에 이르는 거대한 
교량 역할을 했다. 이곳을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많은 생물종들이 교환되었다. 
무엇보다도 시베리아로부터 인간이 이 교량을 넘어 
아메리카로 가서 오늘날 ‘인디언’이라 부르는 아메리카 
선주민이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반대편으로는 여러 동물들이 넘어갔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말이다. 
고향을 떠난 말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까지 널리 퍼져갔지만, 정작 자기 고향인 아메리카에서는 멸종당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 한다.) 
아메리카에 다시 말이 나타난 것은 콜럼버스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다. 
그는 1494년에 24마리의 수말과 10마리의 암말을 들여왔는데, 이 말들은 에스파뇰라 섬에서 크게 번성했다. 
베링기아를 건너갔던 말은 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살다가 아랍 지역에 들어갔고, 그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에 아랍 말이 전해졌다가, 다시 스페인인에 의해 아메리카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후 19세기가 되면 서부영화에서 보듯이 미국 서부 지역에까지 유럽산 말과 소가 넘쳐나게 되었다. 
마이브리지의 말 사진은 1만년 만의 극적인 귀향을 축하하는 기념사진처럼 보인다.

:: 말의 진화

5000만년 전 60㎝ 길이의 에오히푸스가 진화 거듭

말은 5000만년 전에 존재했던 약 60㎝ 길이의 에오히푸스(Eohippus)로부터 오늘날의 에쿠우스(equus)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거듭해 오는 동안 초원 위를 빨리 달리는 성질을 계속 강화해 갔다. 발가락이 사라지고 대신 발굽이 생겨났으며, 
다리는 더 길어졌다. 그래야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커지고, 귀는 모든 방향으로 돌 수 
있으며, 코가 발달한 것 역시 위험을 빨리 인식하고 빠른 속도로 달아나기 위해서다. 말은 평지에서 최고 시속 60㎞로 
달릴 수 있고, 하루에 160㎞까지 달릴 수 있다. 이 겁 많고 잘 놀라는 동물은 잠자는 방식도 아주 특이해서, 
낮에 10~15분씩 짧은 잠을 여러 번 자는데 이것을 전부 합쳐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으며
(이에 비해 사자 같은 포식동물들은 하루에 16시간까지 잔다), 또 눕지 않고 선 채로 잔다. 
다만 며칠에 한 번 누워서 1~2시간 정도 깊은 잠을 자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무리 중에 일부가 보초를 서서 위험을 
예방한다. 게다가 야생 상태에서는 아무리 느린 정도라도 계속 움직이는 버릇이 있다. 
육식동물의 먹이로 태어난 까닭에 말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움직임의 `화신이 되었다.

▲ 미국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1877~1878년 24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연속촬영한 
말이 달리는 모습. 이 사진으로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궁금해 하던 ‘말의 네 발굽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풀렸다.
인간과 말이 언제부터 만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에 가장 많이 그려진 동물 중 하나가 말이라는 점을 보면 사람들은 일찍부터 말을 영험한 동물로 
본 것 같다. 그러나 말의 가축화는 다른 동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다. 
개보다는 6000년, 소보다는 3000년 늦은 시기인 기원전 4000년경에 우크라이나 남쪽의 드니에프르 강 유역에서 말이 
사람 손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때에는 다른 용도보다는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오랫동안 말고기는 
쇠고기만큼이나 맛있고 값진 식량이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식용(食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갈수록 줄어서, 
프랑스의 통계를 보면 1년에 약 2만7000마리 정도만 스테이크 재료로서 생을 마칠 뿐 대부분의 말들은 30세를 넘겨 
말 양로원에서 늙어 죽는다고 한다.

:: 말과 인간의 만남

6000년 전 식용으로 길들여진 후 수송·농사에 이용

사람과 말이 포식자와 먹잇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첫 가축화 이후 1000~2000년이 더 지난 후의 
일이다. 이제는 잡아먹기보다는 말의 힘을 이용해서 수송, 농사, 전투 등의 다양한 용도로 말을 부리게 되었으니 
일종의 재가축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말의 힘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이는 정말로 힘들고 복잡한 문제이다. 동물의 강력한 근육 힘을 사람이 바라는 여러 방식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마구(馬具)들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등장한 마구로는 재갈이 있다. 기원전 2000년경에 등장한 재갈은 
서서히 사방으로 퍼져가서 기원전 800년경이면 유럽과 시베리아에까지 보급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길마, 안장, 가슴 띠, 멍에, 목줄, 뱃대끈 등 여러 마구들의 발명과 보급을 자극했다. 
이것들이 각각 어디에서 처음 나와서 어디로 전해졌으며 또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기술사(技術史)의 중요 
토픽들이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은 고전적인 사례로는 등자(`?子·stirrup)를 들 수 있다. 등자는 안장 위에 앉은 사람에게 
안정성을 주고, 그래서 피로를 줄여주며 다양한 승마 스타일을 가능케 한다.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말을 타면 몸이 
불안정하여 아주 힘든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고대 아시리아인들은 등자가 개발되기 이전에 말을 탔는데, 
이들은 고삐를 잡아당기거나 양다리로 힘을 가하면서 말이 달리는 방향을 조정하고, 또 그런 상태에서 활을 쏘았으니 
정말로 대단한 기마 실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등자는 아마도 기원전 500년경에 인도에서 ‘발가락 등자(toe stirrup·
고리 모양의 로프로 엄지발가락을 넣게 되어 있다)’  형태로 처음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지고 이곳에서 다시 아시아를 관통하여 유럽에 전해져서 800년경 샤를마뉴 시절에 유럽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등자의 도입이 유럽에 봉건주의를 확립시킨 요인이라고까지 주장한다.

:: 말과 권력

전투에 사용되면서 무력의 핵심으로… 국가·귀족이 독점

말은 농사에도 널리 쓰였지만 그보다는 전투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는 데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러 문명권에서 말은 무력의 핵심 요소였다. 고대와 중세에 말은 오늘날의 탱크와 전투기에 해당한다. 
빠른 스피드와 높이의 이점을 가진 기병이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르며 보병을 덮치면 압도적 우위를 누렸다. 
이 때문에 말은 무력을 장악한 사회 엘리트, 즉 전사 귀족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국가나 귀족만이 말의 이용을 
독점하고 말의 번식, 수출입, 조련 등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은 유럽, 중국,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명마 부케팔루스.
강력한 기마민족이 이웃 지역을 공격하고 점령하는 일은 유라시아의 역사에서 거듭 반복되는 스토리이다. 
인류문명의 초기인 수메르 시대에 말이 전투에 사용된 이래 고대 제국의 역사에서 말과 마차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가 되었다. 
기원전 18세기에 힉소스가 기마 전차를 앞세워 이집트를 공격해 들어갈 때의 기록을 보면 
“전차가 마치 화살처럼 날아오고 말발굽은 천둥소리를 낸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계 제패를 목표로 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해 들어갔을 때에도 기마대가 전면에 서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루스(‘소대가리를 한 말’이라는 뜻)라는 명마를 타고 친위 기마대를 지휘하며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인도에까지 이르는 동안 단 한번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이 영웅의 신화적인 일대기에서 말 이야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문화 |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② 말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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