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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① 커피 - 2

바람아님 2015. 6. 3. 09:42
[새연재 | 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① 커피 - 2
‘神이 내린 기적의 약’에서 유럽 부르주아들 고급 음료로

:: 18세기

황실·귀족 음료서 서민층 확산… 유럽 각국 커피 재배 나서

처음에 커피는 왕실 사람들과 귀족층만 즐길 수 있는 고급 음료였으나 점차 광범위한 사회 계층으로 퍼져갔다. 
17세기에는 아직 낯선 물질이었던 이 음료는 18세기가 되면서 ‘부르주아의 음료’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 그 다음 세기에는 커피에 설탕을 듬뿍 집어넣어서 칼로리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일반 서민들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수입량도 늘어났고, 결국은 모카 인근 지역의 생산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유럽 각국은 곧 자국 식민지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1712년에 네덜란드가 
자바 섬에 커피나무를 이식한 것을 시작으로 곧 부르봉, 카옌, 마르티니크, 자메이카, 생도멩그 등 여러 섬에서 커피가 
재배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제 국내 수요를 맞추는 것을 넘어 세계 다른 지역에까지 수출했다. 
네덜란드가 자바 커피를 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판매한 것이 한 예다. 그리하여 커피는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음료로 성장해 갔다. 커피는 처음 접하면 쓴맛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음흉한 검은색 때문에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지만,
일단 한번 마시게 되면 곧 길들여지게 된다.

▲ 에티오피아의 한 마을에서 커피를 건조시키고 있다. 
석유 다음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무역품목인 커피는 전세계적으로 매일 10억컵이 소비되며 연간 판매액만 800억달러에 이른다. 
/ photo 조선일보 DB
:: 19세기

우리나라에도 상륙… 고종황제가 최초의 매니아

19세기 말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커피가 들어왔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커피를 마신 사람 중 한 명이 고종황제일 것이다.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흉흉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 동안 머물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그 동안 친일내각이 몰락하고, 김홍집·정병하 같은 대신들은 군중들에게 타살 당하고, 
내각은 다시 옛날식 의정부(議政府)로 되돌려지고, 많은 이권들이 러시아 측에 넘어가고…. 
국사(國事)가 이처럼 처연하게 돌아갈 때 고종황제께서는 러시아 공사 측이 대접하는 커피를 마시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
계셨다. 
커피의 쓴맛과 검은 색깔 때문에 보약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 왕세자와 함께 매일 아침 대접에 커피를 가득 담아 
좍 한 번에 들이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고종황제가 커피 향을 음미하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커피 맛을 
제대로 알고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왕실에서 시작된 커피 소비가 곧 신분 높은 고관들에게 퍼지고, 이어서 문인들이 다방에 모여 유유자적 인생과 
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품목이 되었다가, 1960~1970년대의 독특한 ‘모닝(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마심으로써 
영양보충까지 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도 유럽 커피의 역사와 거의 같은 궤적을 보인 
셈이다.

:: 커피의 발전

이성적 음료, 육체노동서 정신노동시대로의 전환과 맞물려


▲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의 간판
커피가 이처럼 전세계로 퍼져가게 된 기본 동인이 무엇일까?

아마도 커피가 근대 부르주아 문화와 내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커피는 부르주아의 심성과 잘 어울리는 음료, 즉 이성적이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라 할 수 있다. 아침부터 맥주나 포도주를 마셔서 머리가 둔해진 수공업자, 혹은 어딘지 나른하고 에로틱한 분위기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귀족들과 대비되는 도시 중산층 시민의 전형적인 기호품이 된 것이다. 
17세기에 이미 커피 선전 문구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알코올이 드리운 안개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인류는 커피의 도움으로 깨어나 시민적 각성과 근면성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커피는 영국의 청교도주의, 혹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뒤에 가지고 있다. 
중세의 육체노동자에서 근대의 정신노동자로의 전환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국의 커피하우스가 사업 장소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읽을 수 있다. 
1687년 혹은 1688년에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런던의 타워스트리트(Tower street)에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라 
이름 붙인 가게를 냈다가 이것이 롬바르드가(Lombard Street)로 옮겨져 약 80년 동안 번성했다. 
이곳에는 선장, 선주, 상인, 보험회사 대리인 등 항해와 관련된 업자들이 많이 몰려와서 정보를 교환했는데, 
이것이 후일 세계 최대의 보험 및 해운 사업체로 발전한 것이다.

:: 커피와 문화

부르주아 가정의 아늑함 상징… 산업발전에 따른 일종의 보상

▲ 커피나무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커피가 이처럼 근대 사회의 공적(公的) 영역에서만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사적(私的) 
영역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커피는 부르주아 가정의 아늑함을 보장해 주는 상징으로도 중요해졌다. 
사업가들이 아침에 활기차게 일을 시작하기 위해 커피하우스에서 모닝커피를 마셨던 데 비해, 여성들은 오후의 커피 
모임을 만들어서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는 기회로 삼았다. 근대 사회는 냉철하고 타산적인 기업가들의 모임처럼 차가운 
성격을 띠지만, 동시에 그런 측면을 완화시켜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만큼이나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스위트 홈(sweet home)’이 강조되는 것이 그런 점을 가리킨다. 
커피는 그 양쪽 세계 모두와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파인과 길모어의 ‘고객체험의 경제학’에 나오는 분석에 따라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가격 구성을 살펴보자.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원재료로서 원두 가격은 고작 1~2센트에 
불과하다. 이 원두를 잘 갈아서 포장한 다음 포장, 명칭, 가공법을 바꿔가며 제품화하여 팔면 값이 오르지만, 
이때에도 한 컵 분량으로 보면 대개 5~25센트 정도이다. 
이것을 가지고 일반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팔면 대개 1달러 정도로 가격이 오른다. 
그런데 별 다섯 개짜리 고급 레스토랑이나 품위가 넘치는 카페에서 팔면 브랜드 값으로 대략 5달러까지 된다. 
파인과 길모어는 커피가 가장 비싸게 팔리는 곳의 예로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의 커피 가격 15달러를 제시한다. 
1센트와 15달러라는 큰 가격차를 만든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단순히 커피라는 물질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가공하여 ‘체험’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가 커피라고 말할 때에는 단지 카페인과 같은 물질의 
약리적 효과만이 아니라 이 물질과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문화까지 포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종교성으로부터 근대 부르주아 문화에 이르기까지 커피와 관련된 긴 궤적을 따라가 
보았다. 커피는 이제 우리 삶에서 떼어내기 힘든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한 잔의 커피 속에는 지구 위의 여러 문명들의 다양한 요소가 여릿여릿 녹아들어 있다.

/ 주경철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인문대 서양사학과 부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